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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성지연구소
2022년 4월 01일
In 아콜루씨아(Ακολουθί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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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성지연구소
2021년 12월 31일
In 아콜루씨아(Ακολουθία)
그리스성지연구소에서 계간지 아콜루씨아를 창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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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성지연구소
2021년 7월 01일
In 성지순례
일시 : 2021년 6월 24일 오전 11시 (한국시간) 장소 : 줌을 이용한 비대면 참석 : 이사장님, 이사진, 연구소장, 연구원 등 15명 설교 : 이사장 송병학 목사 본문 : 사도행전 28 : 1 ~ 10 제목 : 성경이 남긴 이야기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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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성지연구소
2021년 6월 24일
In 성지순례
죽음조차 이긴 신앙의 힘은 늘 감동입니다.
트리니티 수도원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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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성지연구소
2020년 12월 22일
In 성지 묵상
어느 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온 나에게 내자가 집안에 있었던 해프닝을 설명할 때 귀로 들으면서 웃지도 그렇다고 울지도 못하는 심정이 되어 있었다. 마치 방망이로 뒤 통수를 연신 얻어 맞은 착각에 젖어 들었고 몸 떨리는 아니 영혼이 진동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리스에서 사역하고 계신 한국에서 오신 모 사모님께서 잠시 저희 집에 머물고 계실 때에 아들 희랍이가 자동차와 오토바이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놀면서 ‘상 놈의 새끼’라는 말을 쓰기에 정색을 하시곤 ‘희랍아 그 욕은 이제 한국에서도 잘 쓰지 않는 말이야, 그 말은 아주 나쁜 욕이란다.’ 하시자 고개를 저으며 냉큼 답하기를 ‘아니에요, 그 건 목사님만 쓰는 좋은 말이에요’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그 동안 내가 무심코 사용했던 말들이 여과 없이 내 아이의 뇌리에 입력되어 있다가 일순간에 튀어 나온 것이다. 정화되지 못한 내 언어, 못난 내 인격이 아이를 통해 백일하에 들어난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축소판이요 판박이 라는 말이 그렇게도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다섯 살 먹은 내 아이의 심연에 자리잡은 나의 자아상은 무엇일까? 내 일상의 또 다른 목격자인 내자(안 사람)에게 과연 나는 무엇일까? 폭군, 위선자, 대책 없는 사람, 가슴 뜨거운 하지만 연약한 남자, 주의 종, 하나님의 사람, 목사, 식충이, 만년 학생... 서울 D교회에 시무하시는 스승이요 선배이신 H목사님께서 로마서 강의 시간에 자신의 체험을 말씀하시길 ‘어느 날 차를 몰고 가는데 후미 차량이 들 죽 날 죽에, 크락션에, 끼어들기에, 험담까지 해서 참고 참다가 성질이 폭발해서 육두문자를 썼더니 뱃속까지 시원하더라’고 말씀하셔서 «목사고 나발이고»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목사고 나발이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즉 직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삶이다. 직분 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은 오늘의 공해 중의 공해다. 기독교인으로 주일 한 시간의 예배, 성가대원, 주일학교 교사, 집사, 장로, 목사 등등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생활이다. 그리고 우리 일상의 가장 정확하고 중요한 목격자는 우리들의 아이들이다. 그들의 평가는 가식도 체면도 없는 생 날 것이며 반사체다. 그들은 우리의 언어를 배우고 삶을 배우고 신앙을 배운다. 본인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것은 언어 도단이며 사치다. 자신은 담배를 피우면서 중학생 아들에게 ‘너는 피우지 말아라’하는 것은 피우라는 권면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 말하면서 슬그머니 지나쳐 버리는 것은 처세술 교육이다. 누가 전화를 찾으면 ‘엄마 없다고 해라’ 하는 것은 연극 교육이다. 자신은 도무지 배우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공부해라’고 고함 지르는 것은 파렴치한과 같은 행위이다. 자식 생일에 축하하러 온 자신의 친구들과 어울려 아이들은 방에 가두어 버리고 거실에 앉아 고스톱 판을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유사한 우리들의 모습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우리가 먼저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언어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종내 답습하는 것이다. 방탕한 아들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지만 실상은 방탕한 부모가 있는 것이다. 참된 인격은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정에서 아내와 자식에게 그리고 고용인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가정은 국가의 기초이다’라고 말하였으며, 페스탈로치는 ‘가정이여! 너는 도덕상의 학교이니라’고 강조하였다. 우리의 실상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은 교회도 직장도 사회도 아니다. 바로 가정에서 참된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할 때다. 아벨을 쳐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에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답하였는데 이러한 답변의 방법은 그의 부모 아담과 하와로부터 배운 못된 기술인 것이다. 자신은 연신 옆으로 걸으면서 자식에게 똑바로 걸으라고 핏대 올리는 게가 돼서는 안되겠다고 다짐 해 본다. 아내 앞에서 아들 앞에서 더욱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게 하소서. (이런 사건이 25년 전에 있었고 이 글을 쓴 지 23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여전히 욕을 쓰고 있다. 하여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죄인 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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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2일
In 성지 묵상
내 어릴 때의 목사님에 대한 의식은 두꺼운 안경과 그 너머에 있는 날카로운 시선과 미소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목사님의 아들을 절친한 친구로 두었던 나는 사택에서 그들의 삶의 단면을 종종 보아왔다.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엄격함과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이 나에게 가끔은 커다란 모순으로 다가왔지만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사랑은 그 모순을 상쇄하고고 남아 지금껏 내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다. ‘목사란 반드시 눈이 네 개가 있어야 (눈目 넉四, 육적인 눈에 영적인 눈을 합하여) 하고, 목이 곧지 않고 죽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세월과 함께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생각하는 목사에 대한 부정적 의식구조는 대체로 아래와 같다. «목사가 나이가 어리면 경험이 부족하다 하고, 나이가 많으면 시대에 뒤 떨어진 목사라 하고, 식구가 많으면 주책이라 하고, 적거나 없으면 그래서 가정을 이행하지 못한다 하고, 원고를 보고 설교를 하면 신령치 못하다 하고, 원고 없이 설교하면 도무지 준비성이 부족하다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쏟으면 인기작전이라 하고, 부유한 사람과 친하면 돈만 안다 하고, 예화를 많이 인용하면 성경 실력이 없다 하고, 예화를 인용하지 않으면 너무 딱딱하다 하고, 죄에 대해 설교를 하면 인신 공격한다 하고, 아니하면 정의감이 부족하다 하고,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면 줏대가 없다 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사랑이 없다 하고, 옷을 잘 입으면 사치한다 하고 꾀죄죄하면 교회 망신만 시킨다 하고, 밖에 나가 설교를 하면 본 교회를 등한히 한다 하고, 나가지 아니하면 실력이 없다 하고, 사례를 많이 받으면 돈만 안다 하고, 적게 받으면 교인들의 체면이 무엇이냐 하고, 몸이 아프면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 하고, 건강하면 금식도 할 줄 모르고 몸만 위한다 하고, 찬송가만 부르면 벽창호라 하고, 유행가라도 부르면 너무 세상적이라고 하고...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누군가 부른 유행가 가산디...) 목사에 대한 긍정적 의식구조 속에서 관계를 갖고 대한다면 그들의 사역과 삶의 자리와 고통을 한결 이해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신 것 가운데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전4:1)라는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시 들려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목사의 주식은 아멘, 부식은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후식은 감사합니다’’라는 스승의 가르침은 상당히 해학적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요소와 동시에 내 삶에 일관적인 부담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주식, 부식, 후식은 없고 그저 ‘수고 하셨습니다’ 라는 말과 말없음 표의 행진에 더욱 무표정인 마른 손만 대한다면 목사는 가슴 메어져 오는 아픔을 부여 안게 된다. 따라서 교회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많이 되뇌어지는 것이 좋은 일이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목사와 성도가 서로서로 감사의 언어로 교제 하여야 한다. 목사란 어느 특정인의 목사일 수는 없다. 영국의 마이어(MEYER, F.B) 목사는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알려진 신앙인 워너메이커(WANAMAKER)의 전보로 미국에 건너가 만나게 되었다. 워너메이커의 말은 ‘‘큰 강당과 성경학교도 지어 목사님께 드릴 터이니, 필라델피아로 오십시오’’ 라는 것이었다. 그 때 마이어 목사는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못되고 워너메이커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그는 크게 감복하여 마이어 목사를 더욱 존경하고 축복했다는 일화가 전해 지고 있다. 목사로 하여금 개인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격려하고 고무해야 할 책임은 바로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요구하지 말라. 그는 결코 슈퍼맨이 아니다. 그는 이래저래 가슴 아파하는 연약한 그릇인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 그는 당신의 기대를 또한 모두의 기대를 다 채울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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