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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데

현지명 : 크리티(ΚΡΗΤΗ)

1. 성경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하고." (사도행전 2 : 11)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사도행전 27 : 7 ~ 21)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디도서 2:11)

2. 지명의 유래

Κρήτη < αρχαία ελληνική Κρήτη

Κρήτη: Το όνομά της σημαίνει κραταιή, αυτή που είναι κράτος. Κραταιή σημαίνει ισχυρή, δυνατή. Η Κρήτη υπήρξε η μεγαλύτερη θαλασσοκράτειρα του κόσμου και οι πρώτοι της φύλακες ήταν οι Κουρήτες από τους οποίους πήραν το όνομά τους οι Κρήτες.

 

 그 이름은 상태를 의미한다. 상태는 강함을, 힘을 의미한다. 크레타(그레데) 섬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바다 제국이었고 최초의 수호자는 크레타 인들이 그들의 이름을 따온 쿠리 족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쿠리 족은 크레타 섬의 첫 거주자였다.  다섯 형제, 헤라클레스, Paeon, Epimides, Iasius 및 Idas는 태어나지 않았지만 갓 태어난 제우스의 첫 눈물로 비가 올 때 지구에서 성장했다.  다른 신회에 따르면 쿠리는 레아가 크레테의 동굴에서 제우스를 낳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제우스가 어릴 때 울 때마다 드럼과 방패를 두드려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가 크로노스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고 전해진다. 

 크레타는 크레타 문명 또는 미노스, 미노아스 문명 등으로 알려졌다. 고대의 빼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으며 비잔틴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성화를 남긴 이들을 많이 배출한 ‘그레데 스홀리’(그레데 학교)가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성화가인 도미니꼬스 쎄오또꼬뿔로스는 우리들에게 엘 그레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근대 사상가로 위대한 족적을 남긴 니콜라스 카잔차키스가 있다. 정치, 문화, 연극, 음악, 미술 등에서 그 이름을 드날린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크레타 섬은 에개 해에서 가장 큰 섬이며 지중해에서 시껠리아, 사르디니아, 끼쁘로, 꼴시끼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크레타 섬의 면적은 8,300 sq.Km, 해안선의 길이는 1,047Km, 상주인구 약 60만명이다. 크레타의 행정구역은 하니온(수도 하니아), 이라끌리우(수도 이라끌리오), 레씸니스(수도 레씸노), 라시씨우(수도 아기오스 니꼴라오스)의 네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크레타 산지는 서부에 ‘레프까 오리’(빠흐네스-해발 2,453m), 중부에 ‘프실로이띠스’(해발 2,456m), 동부에 ‘딬띠’(해발 2,148m)가 있다. 북쪽 해안은 깊고 넓은 만을 많이 갖고 있으며 그 가운데 수다만은 지중해의 가장 큰 자연적 항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올리브, 포도, 오렌지, 체리, 토마토, 바나나 등이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갈탄, 활석, 철광석, 구리 등이 생산되고 있다.

 양과 염소 등의 목축업이 발달되어 있으며 특산물로는 올리브 오일, 포도주, 치꾸디아, 건포도, 치즈, 화훼 등이 있다. 천과 수예품, 성화, 세라믹 류, 금은 수공품 등은 명성이 높은 제품들이다.

 크레타 섬은 유럽에서 100Km, 아시아에서 180Km, 아프리카에서 270Km 떨어져 있으며 세 대륙의 교차점에 위치함으로 수 많은 문물의 교류가 이루졌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은 군사적으로도 요지가 되어 수많은 침략과 약탈을 당했으며 때로는 노예로 팔려가고 마을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타 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과 색채를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3. 역사

  • 신석기 시대 : 크레타 섬에 최초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6000-5000년 경으로 알려져 있다.

  • 미노이끼 시대 : ‘미노이꼬스 뽈리띠스모스’(미노아스 문명)라는 말은 크레타 신화 속의 왕인 미노아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와 함께 미노아 문명도 시작되었다. 기원전 2600년경에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 이뽀미노이끼, 알하이끼 시대 : 기원전 1100년경에 그리스 서쪽에서 온 도리아인들이 정착하면서 많은 자치 도시들이 생겨났다. 이 시기에 세라믹에서 철기로 변화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작업의 개량을 가져왔다. 

  • 끌라시끼, 엘리니스띠끼, 로마이끼 뻬리오도스(고전, 헬레니즘, 로마 시대) : 기원전 500년경 ~ 기원후 330년 경의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대에 크레타는 정치, 경제, 문화에서 두드러진 사건이 없던 시대였다. 이후 크레타는 많은 약탈자들의 대상이 되었으며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로마시대인 기원후 63-66년 경 바울 사도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며 68년에 로마에 정복되었다.

  • 비잔띠니 뻬리오도스(비잔틴 시대, 395-1204) : 826-961년에는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에 기독교 인들은 잡혀 죽거나 이집트와 아시아 지역에 노예로 팔려 나갔다. 961년 니끼포로스 포까스 비잔틴 장군에 의해 다시 비잔틴 제국의 관할하로 회복되었다. 

  • 에네또끄라띠아(베네치아 공화국 시대, 1204-1669) : 1453년 터키에 의해 꼰스딴티누뽈리가 함락되면서 수많은 그리스 인들이 베네치아의 수중에 있는 크레타 섬으로 이주해 왔다. 이렇게 하여 그레데에 비잔틴 문화와 예술이 새롭게 꽃피게 되었다. 그레데 섬이 비잔틴 문화의 한 중심지가 되었으며 신학, 철학, 음악, 문학, 연극이 발달하였다. 특히 이라끌리오의 아기아 애까떼리니 수도원은 비잔틴 문화의 산실이라고 불렸다.

  • 뚤꼬끄라띠아(터키 시대, 1669-1898) : 베네치아 통치 말기에 지속적인 터키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으며 1538년 하이레딘 발바로사에 의해 크레타 중부와 서쪽이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크레타는 터키지배에 끊임없이 대항했다. 

  • 크레타 공화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의 4대 강국은 터키인들을 섬에서 추방하고 1898년 말 ‘그레데 뽈리띠아’(크레타 공화국)를 세웠다. 그리스 본토와의 통합은 1905년 연합항쟁 8년 후인 1913년도에 이루어 졌으며 크레타 출신 베니젤로스가 초대 수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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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적지와 볼거리

이라끌리오 자치구

 이곳에는 유명한 미노아스 시대의 왕궁인 크노소스와 패스또스, 말리아가 있으며 남서쪽 섬에서 가장 크고 넓은 평야인 메사라가 있다.

 신화에 의하면 메사라에 황소로 변한 디아스(제프스)가 페니키아의 공주였던 아름다운 에브로삐를 내려 놓았으며 이들의 사랑을 통해서 크레타 섬의 통치자가 된 미노스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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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끌리오

 이라끌리오는 크레타 섬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곳으로(약 12만명) 이라끌리우 자치구의 수도이며 또한 1972년부터 크레타 섬의 수도가 되었다. 크레타 북쪽 해안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커다란 항구와 국제 공항이 자리하고 있어 많은 방문객들이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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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띠또스 교회

 이라끌리오의 주요한 도로 가운데 하나인 말띠론 25 아브구스뚜 거리에 있는 이 교회는 본래 비잔틴 제국 시대에 건립된 것이며 1557년도에 다시 건립되었다. 이후 터키 시대에 베질 자미(베질 회교사원)로 사용되었고, 1856년 큰 지진으로 파괴된 것을 1922년 복원했다. 현재는 동방교회 정교회로 사용되고 있으며 성인 띠또스(디도), 루끼아스, 말디노스, 스떼파노스 유골의 일부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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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미나스 교회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그리스의 가장 큰 교회 가운데 하나로 감독좌가 있는 교회다. 교회의 북서쪽에 성 미나스 교회의 전신인 교회가 상당히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성 미나스 교회 옆에 있는 성 애까떼리니 교회는 1600년에 건립되었으며 현재는 교회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곳에 도니니꼬스 쎄오또꼬뿔로스(El Greco)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깔리 리메네스

 항구 맞은 편, 불과 몇 백 미터 거리에 지역 주민들이 작은 섬이라고 부르는 "Apostolos Pavlos" 섬이 있다. 근처 언덕에는 사도 바울에게 헌정된 교회가 세워져 있다. 1911 년에 지어진 교회는 1700 년 베네치아지도와 정확히 같은 위치에 있다. 성전 옆에 있는 작은 동굴에 사도 바울이 머물렀다는 전승이 있다.

 이곳은 매우 오래된 항구로, 사도행전 (27:8)에 언급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이송될 때 지난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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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씨우 자치구

 크레타 섬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앙에 아름다운 도시인 아기오스 니꼴라오스가 있다. 라시씨우 지역은 아름다운 해안과 모래해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지역에 아주 유명한 ‘딖때오 안드로’ 동굴이 있는데 신화에 따르면 바로 이곳에서 디아스(제프스-제우스)가 태어났다. 라시씨우 지역 북동쪽에 ‘바이’ 해안이 있는데 고운 모래와 야자수로 명성이 자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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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오스 니꼴라오스

 크레타 섬의 아름다운 만에 위치한 아기오스 니꼴라오스는 라시씨우 자치구의 수도로 연중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림 같은 항구에는 수많은 작은 배들이 줄지어 정박되어 있고 집들 또한 줄지어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항구의 다른 쪽에는 아름다운 해안이 펼쳐져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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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씸니스 자치구

 크레타 섬의 동쪽 하니아와 수도인 이라끌리오 사이에 위치한 이 자치구에는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인 프실로리띠스 산(해발 2,456m)이 있다. 이 산지의 초입에 ‘이대오 안드로’가 자리하고 있는데 신화에 따르면 디아스(제프스)가 이곳에서 자랐다고 한다.

자치구의 북쪽 해안은 끝 간데 없을 정도로 긴 모래 해변이 있으며 알까디와 쁘레벨리스에는 유명한 수도원들이 있다.

레씸노

 레씸니스 자치구의 수도인 이곳은 오래되고 전통적인 경관을 가진 마을이 남아 있으며 좋은 모래 해안이 있어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곳 가운데 하나다. 

 베네치아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뽈떼자 성채 또한 잘 보존되어 있다. 뽈떼자 입구에 고고학 박물관이 있으며 레씸노 항구와는 삐래아스와 선편이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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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리니 모로지니

 1628년 프랑키스꼬 모로지니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주민들은 이 조형물을 ‘리온타리아’(사자들)라고 부른다. 그리스 신화가 형상화된 조각 특히 뜨리또네스, 님페스, 델피니아, 황소 또는 바다 괴물 그리고 분수를 받치고 있는 4개의 사자상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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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끌리오 성벽

 유명한 이라끌이오의 성벽은 기원후 14세기로부터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전체 길이가 4.5Km이며 성벽의 가장 두꺼운 곳은 60m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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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온 자치구

 크레타 섬 가장 서쪽에 위치한 이 자치구에는 ‘레프까 오리’(흰 산지)가 있으며 아주 유명한 사마리아 계곡이 있다. 또한 이 자치구에는 그리스의 가장 큰 자연 항구인 수다 만이 있으며 끼사무 만에는 끝간데 없는 모래 해안이 펼쳐져 있다. 이곳을 걷다 보면 감사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차오른다.

하니아

 하니온 자치구의 수도로 크레타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쉼 없이 찾아 드는 사람들의 발길은 이곳이 크레타 섬의 행정의 수도였던 점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하니온 자치구에서 가장 큰 볼거리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 ‘빨리아 뽈리’(구도시)와 베네치아 항구는 그림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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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계곡

 유럽의 가장 아름다운 계곡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은 깎아지른 절벽이 하늘을 뒤로하고 맞닿을 듯 서 있는 모습은 대단한 장관이다. 사마리아 계곡의 전체 길이는 18Km에 이르며 계곡의 가장 좁은 폭은 2.5m에 불과하고 계곡을 통행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6시간이다. 계곡 사이에는 물이 흐르고 작은 호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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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고학 박물관

 이라끌리오의 고고학 박물관은 빼어난 고대의 유물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세계적인 박물관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다. 먼저 이곳 박물관을 관람한 후에 고대 유적지를 돌아보면 고대의 삶의 단면들을 유추해 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들은 크레타의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로 신석기 시대로부터 로마 시대인 기원후 4세기까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후 시대의 유물들은 크레타의 역사와 민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고학 박물관은 입구 층에 13개의 전시실과 상층에 5개의 전시실이 있으며 아래층에 2개의 전시실로 총 20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 1 전시실 :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과 왕궁 전기시대(기원전 2600-2000)의 유물들

  • 2 전시실 : 크노소스 왕궁 전기와 말리아에서 발굴된 유물들, 크레타 섬 동부와 중심부의 성소에서 발굴된 기원전 2000-1700년 경의 유물들

  • 3 전시실 : 패스또스의 구 왕궁에서 발굴된 기원전 2000-1700년 경의 세라믹류들과 인장 조각도구, 석기 등이며, 가장 주목받는 유물은 '패스또스의 디스크'라고 불리는 점토 원판으로 제의와 관련된 문자가 새겨져 있다.

  • 4 전시실 : 크노소스, 말리아, 패스또스의 신 왕궁시대의 유물들인 기원전 1700-1450년 경의 유물들이며, 뱀을 가진 여신은 그 시대 여성들의 복제와 빼어난 예술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 5 전시실 이하 : 항아리, 은제 도구, 인장, 우상, 등잔 등 크노소스에서 발굴된 기원전 1450-1400년 경의 유물 등을 비롯해 이후 크레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 크레타를 방문한다면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며, 그리스 고대문명의 탄생과 그리스 문자의 출현 등을 볼 수 있는 문화의 보고이다. 

6. 크노소스 왕궁

 이라끌리오 남쪽 5Km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크레타에서 발굴된 유적지 가운데 가장 큰 유적지로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 가운데 하나다. 크노소스가 발굴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라비린쏘스(미궁)를 상상하지 못했다.

​ 첫 번째 왕궁은 기원전 2000년경에 지어졌으며 기원전 1700년경에 지진으로 인하여 무너지고 그 직후 바로 더 크고 완전한 형태의 두 번째 왕궁이 지어졌다. 이 왕궁은 기원전 1450년경에 무너지게 되는데 아마도 씨라(산토리니) 섬의 화산 폭발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여진다. 크레타 문명을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에브로삐와 디아스(제프스)의 아들 미노아스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때는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6000-5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왕궁은 그리스 최초의 정부, 종교, 기술 등의 기법들이 녹아있는 고대 유물의 보고다. 왕궁은 깨라또 강가 계곡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께팔라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크기는 22,000 평방미터에 이른다. 이 도시의 인구는 80,000-100,000 명으로 추정되며 도시의 항구는 암니소스와 이라끌리오였다.

 크노소스는 지중해를 장악하는 해상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체 화폐를 발행하여 사용하였다. 이 주화에는 미노따브로스가 손에 돌을 쥐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으며 또한 아테네 여신과 디미뜨라 여신의 머리가 새겨져 있는 주화도 사용되었다. 이 왕궁은 1878년 미노스 깔로깨리노스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체계적이고 대대적인 발굴은 1900년부터 영국의 에반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왕궁 벽에는 경이로운 색상들로 가득한 아주 빼어난 벽화들이 있으며 바닥은 석판이 깔려있다. 특히 자연적인 조명이 성 안 깊은 곳까지 들어올 수 있는 채광으로 설계되었다. 또한 공기와 바람이 순환되는 통로가 있으며, 배수 및 하수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물을 끌어다 사용한 상수 시설은 보는 이의 고개를 절로 숙이게 한다. 

 왕궁 주변에는 일반인들의 주거지가 있다. 크노소스 왕궁의 거주지는 돌과 나무로 이루어 져 있고 집들은 주로 2층 구조로 되어 있고 6-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장실과 욕조의 배수는 놀라울 정도로 잘 이루어 져 있다. 이 왕궁의 가장 큰 특징은 외곽 성벽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의 다른 지역과는 대조적인 특성으로 크노소스 왕궁의 전성기에 외적의 침입이 없을 정도로 평화롭고 강성했다는 점을 대변해 주고 있다.

 왕궁은 미노스 문명에 있어서 종교와 행정의 중심지이자 생산과 기술, 상업의 중심지였다. 황소와 황소의 뿔과 양날도끼와 뱀은 미노스 문명의 종교적 심볼로 왕권과 제사권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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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레데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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