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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비볼리

현지명 : 암피뽈리(Αμφίπολη )

1. 성경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행 17:1)

2. 지명의 유래

Αμφίπολη < αρχαία ελληνική Ἀμφίπολις < ἀμφίπολις < ἀμφί + πόλις ἀμφί

  • (και ἀμφίς) (τριγύρω) ολόγυρα, και από τις δύο πλευρές

  • (ἀμφίς) (주변) 모든 주변, 양쪽        

Πόλις

1. 도시의 요새, 그 성채

2. 도시, 도시 국가, 고향, 자신의 장소

3. 국가, 넓은 지역

4. 자유 국가, 민주주의

5. 모든 시민, 시정촌

6. 시민의 권리, 시민의 능력

3. 암비볼리의 사자상

 1936-37에 조각나 있던 것을 조립하여 복원한 것으로 기원전 2세기 경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좌대 위에 있으며 이 사자상은 스뜨리몬 강에서 건져낸 것으로 아마도 중세 때 스뜨리몬 강의 댐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 사자상은 레스보스(도데까니시아 제도에 있는 섬으로 ‘미틀리니’라고도 함) 섬의 선원이었다가 후에 시리아의 총독이 된 라오메돈(LAOMEDON)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 사자상이 세워진 이유에는 이 외에 몇 개의 가설이 존재한다.

첫째로, 아란토폴루스(Arrantopoulos) 교수에 따르면, 페리클레스(기원전 437-436)가 아뇨나스라는 아테네 인의 위대한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스파르타 장군 브라시다스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이다.

셋째로, 고고학 교수 오스카 브로니어(Oscar Broneer)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의 경쟁자이자 동반자인 라오메돈(Laomedon)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는 설이다.

넷째로, 라자디스(Lazaridis) 교수에 따르면 이 사자상은 기원전 4세기의 작품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제독 레오스테네스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사가 G. 카프탄치스(G. Kaftantzis)에 따르면, B.C. 356년에 어떤 중요한 사람의 죽음 또는 Amphipolitans와 Philip II 세 사이의 전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사자상이 파괴된 날짜 또한 고고학자들에 따라 다르다. 아테네 인을 증오한 브라시다스의 과두 교도들은 기원전 422년으로 본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B.C.267 년에 Heruls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주장이다. Visigoths는 B.C. 365년, Normans는 1185년, Latins는 1204 년, 불가리아 인은 1206년이라고 본다. 

 사자상이 발견된 지역에 박물관이 세워진 것은 고대 암비볼리가  그 당시 매우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4. 간추린 역사

 데살로니가 북동쪽 106Km, 까발라 남동쪽 63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스뜨리몬(STRYMON)강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로서 원래는 ‘에네아오디’(ENNEA HODOI, 9개의 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명칭은 이로도또스의 역사가(7.114)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XERXES, B.C.519-468)가 강을 건너면서 이 지방의 소년, 소녀 각 9명을 생매장한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B.C. 437년에 아테네 사람들에 의해 암비볼리(AMPHIPOLIS)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이 도시의 부는 이웃에 있는 팡게온 산(MT. PANGAION)의 금광에서 창출되었다. 아테네인들에게 있어서 이 도시는 북쪽 지방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기원전 424년, 스빠르띠의 브라시다스(BRASIDAS)에 의해 이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아테네의 역사가이며 장군이었던 투씨디데스(THUCYDIDES)는 스뜨리몬 강 어구의 에이온(EION)항구까지 회복시켰으나 암비볼리는 회복시키지 못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테네인들은 투씨디데스를 20년 동안 유배시켰다.(THUC 4,104-6;V. 26). 기원전 421년에 아테네인들은 암비볼리 재탈환을 시도한다. 이 전쟁에서 아테네 장군 끌레온(KLEON)과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가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며 결국 후에 이 도시는 358년 빌립보 2세가 점령하게 된다. 이후 168년 피드나 전투(BATTLE OF PYDNA)를 시작으로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며 당시 로마인들에 의해 분할되었던 4지역 가운데 한 지역의 수도가 되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가는 중에 들렸으며(행 17:1) VIA EGNATIA의 중요한 간선 도시였다. 

 마케도니아 시대에  암비볼리는 내부 자율성과 상당한 경제,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강력한 도시였다. 발굴 작업을 통해 성벽의 대부분과 도시의 성역, 개인 및 공공 건물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로마인이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후(B.C. 168) 암비볼리는 마케도니아 제 1 사단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로마 시대의 암비볼리는 로마제국주의 틀 안에서 경제, 문화적으로 매우 번성했다.  로마 황제, 특히 아우구스투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지원으로 고대 후기까지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바닥의 모자이크 문양과 건물 내부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통해 그 당시 암비볼리가 얼마나 큰 번영을 누린 도시였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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