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오
현지명 : 히오스(ΧΙΟΣ)
1. 성경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사도행전 20 :14 ~ 15)
2. 지명의 유래
Το νησί απέκτησε το όνομά του από την Χιόνη, η οποία ήταν κόρη του Ποσειδώνα. Όταν γεννήθηκε στο νησί έπεσε χιόνι γι’ αυτό το μωρό ονομάστηκε έτσι και εξ’ αυτού το νησί Χίος. Λένε μάλιστα ότι όταν έφτασε ο Ποσειδώνας στο νησί ήταν έρημος και με το χιόνι που έπεσε το έδαφός του έγινε γόνιμο.
이 섬은 포세이돈의 딸인 Χιόνη 스노우에서 유래했다. 이 섬에서 태어났을 때 눈이 내렸기 때문에 이 섬의 이름은 Χίος (Chios)가 되었다. 포세이돈이 섬에 도착했을 때 황폐했던 땅에 떨어진 히오니로 인하여 땅이 비옥해졌다고 말한다.
오미로스(Homer)에 따르면 이 섬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기원전에 불렸던 Κίος ή Κέως (Kios 또는 Keo)라는 이름인데 현재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다.
에개 해의 중앙에 있고 터키의 서안에 매우 가까우며 사모스 섬과 레스보스(미띨리니) 섬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이누세스와 프사라 섬 등을 부속도시로 거느리고 있는 섬이다. 섬의 면적은 842Sq.Km, 해안선의 길이는 213Km, 상주인구는 5만 여 명이며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에 적합한 과수와 올리브 그리고 유명한 매스틱(Mastic)이 많이 생산되는 섬이다. 매스틱은 주로 섬의 남부에서 생산되며 북쪽에서는 재배되지 않는다.
기오 섬의 오래된 전승에 의하면 아기오스 이시도로스가 로마인들에 의해 압송되어 갈 때 소리내어 울었는데 그가 흘린 눈물이 땅에 떨어져 매스틱이 되었다고 한다. 지중해 여러 곳에 동일한 유향 나무가 있는데 왜 유독 기오 섬 남부에 있는 나무에서만 유향의 액이 흘러 내리는지는 알 수 없다.
3. 역사
기오 섬 북쪽에 있는 동굴에서 발굴된 유물을 통하여 이 섬에 신석기 말기 기원전 4000-3000년 경에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명한 일리아드와 오딧세아의 작가 호메로스가 기오 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브론타도스 바닷가에 있는 큰 바위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뻴라스고스, 리도스, 까레스 인들이 거주하였으며 기원전 11세기 경부터 이오니아 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9세기에는 에브비아 섬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하였다. 이 때부터 기오 섬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6세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고대의 기오는 이오니아의 12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불려졌으며 상업과 해양 기술이 대단히 발달했었다.
기오 섬은 기원전 545년에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당했다. 이후 477년도에 이곳은 딜로스의 아씨나 동맹에 첫번째 일원이 되었고 378년도에는 두번째로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에 복속되고 이후 로마에 의해 정복당했으며 기원 후 86년도에 실라스 장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기오 인들에게 섬의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이후 다시 비잔틴 제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많은 침략자들의 약탈을 당해 쇠퇴해졌다. 기원후 1045년 콘스탄띠노스 8세 칙령에 의해 유명한 ‘네아 모니’가 건립되었다. 1272년 베네치아에 점령 당했으며, 1346년 제네바 인들에 의해 통치되면서 첫번째 회사인 마오라를 설립하여 매스틱을 수출했다. 1566년 터키에 의해 정복되어 오랜 세월을 고통 속에 살았다. 1822년 히오스 인들은 자유의 기치를 높이 들고 투쟁을 감행함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기간에 터키인들에 의해 자행된 잔학한 학살은 프랑스의 화가 델라크루아에 의해 ‘이 스파기 띠스 히우’(기오의 학살)라는 부제의 그림으로 유럽에 알려 졌다. 또한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또 빼디 띠스 히우’(기오의 소년)라는 시로 터키의 만행이 알려졌다. 이후 1912년에 독립했다. 기오 섬은 고대와 근대에 있어서 오미로스와 글라브꼬스를 비롯하여 유명한 시인, 과학자, 조각가, 역사가, 철학가, 언어학자 등을 배출했다. 꼭 가보기를 권하는 섬 가운데 하나다.
4. 유적지와 가볼 곳
히오스 또는 호라
이곳은 기오 섬의 수도이자 항구로 소아시아의 서안 건너편 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24,000여 명이 살고 있다. 이곳은 이오니아인들이 세운 고대도시에 건립된 도시로 고대의 흔적은 극장과 성벽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터키 시대의 주거지는 항구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오의 심장부라 부른다.
까스뜨로
도시의 북쪽부분에 위치한 이 성채는 비잔틴 시대인 8세기에 건립된 것을 중세에 확장한 것이다. 이후 제노바인들이 확장 수리했으며, 현재에는 성벽, 망루, 성문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을 2세기 동안 통치한 기아스티니아니 가계의 문장이 남아 있다.
네아 모니(신 수도원)
이 수도원은 아에또스 산정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끼미시 띠스 쎄오또꾸’ 교회는 11세기에 건립되었으며 모자이크가 아주 유명하다.
이 수도원은 기오의 수사들인 니끼따스, 요안니스, 요싶에 의해 꼰스딴띠노스 모노마호스 황제의 재정후원으로 건립하였다.
고고학 박물관
기오 섬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토기와 토기 파편들, 조각과 아이콘들이 있다. 기원전 6세기에 기오 섬에는 조각학교가 운영되었다.
기원전 3000년부터 로마시대까지의 비석과 비문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그 가운데 기원전 332년 경의 알렉산드로스의 서간문이 눈길을 끈다.
매스틱 마을
기오섬 남쪽 13Km 지점에 있는 쏠로뽀따미부터 매스틱 마을이라고 부르는데 깜보스 남쪽의 좌우에 있는 나무들이 전부 유향나무다. 이곳에 있는 한 그루의 유향나무에서 해마다 생산되는 매스틱은 200g이다. 매스틱은 화장품 재료와 천연 껌, 과자와 사탕류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삘기
이곳은 중세마을로 건물의 외벽에 흰잿색 돌을 사용하여 기하학 문양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전통 마을이다. 이곳 주민들은 이러한 장식을 ‘크시스따’(피막들)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아기온 아뽀스똘론 교회의 외벽 장식은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주며, 또한 교회 내부의 벽에 그려진 성화는 매우 빼어나다.
메스따
중세마을로 그 시대의 환경과 분위기와 전통을 잘 유지, 보존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5개가 있으며 좁은 골목, , 가게 등 상당한 미로로 되어 있다. 마을 중앙에는 그림 같은 광장이 있으며 ‘빨리오스 땈시알히스’ 교회는 방문해야할 가치가 있다.
가르침의 바위
역사가 이로도또스에 의하면 호메로스가 이 바위에 걸터앉아 주민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이 바위를 ‘뻬뜨라 뚜 오미루’ 즉 호메로스의 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에 앉아 눈을 지긋이 감고 호메로스를 떠올려 보라.
아나바또스
텅빈 마을로 1822년 터키의 학살을 피해 섬의 각지에서 숨어 들었던 피난처이다. 1881년 지진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 것을 근대에 재건했다. 잿색의 돌로 2층으로 지어진 이곳은 약탈자들의 손길을 피난용 목적으로 형성된 마을이었다.
풍차
기오섬의 랜드마크라고 생각하는 곳이다.
오랜 시간을 지내 상처난 흔적들은 단잔한 돌조차 이길 수 없는 시간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