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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현지명 : 이 빨리아 꼬린쏘스(Η ΠΑΛΑΙΑ ΚΟΡΙΝΘΟΥ)

1. 성경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2. 지명의 유래

 그리스는 크게 그리스 대륙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그리고 섬들.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고린도는 그리스 대륙과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지협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오니아 해의 고린도만 쪽으로는 레헤온 항구와, 에게 해의 사로닉만 쪽으로는 껭흐레아 항구를 끼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별히 빨리아 고린도 옆에 있는 ‘아크로고린도’ 즉 고린도 성채는 함락 불가능의 요새로 유명하다. 아테네에서 서쪽 87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  Προελληνικό τοπωνύμιο αγνώστου ετυμολογίας.

·  Κατά τον Γερμανό φιλόλογο Φρίντριχ Σόλμσεν (1904-1989) έχει καρική προέλευση.

·  Κατά το Γάλλο γλωσσολόγο Πιερ Σαντρέν (1899-1974) θα μπορούσε να προέρχεται από τη λέξη κόρυνθος (μάζα ψωμιού) και ως εκ τούτου απ το αρχαίο ουσιαστικό κόρυς (περικεφαλαία, κράνος).

 

  • 알려지지 않은 어원의 그리스 이전 지명.

  • 독일의 문헌학자 인 Friedrich Solmsen(1904-1989)에 따르면 그것은 Caric 기원을 가지고 있다.

  • 프랑스 언어학자 Pierre Sandren(1899-1974)에 따르면 이 단어는 korynthos (빵 덩어리)라는 단어, 또는 고대 명사 korys (머리장식, 헬멧)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유래한 격언 «Ου παντός πλειν ες Κόρινθον» = Δεν μπορεί ο καθένας να πλεύσει στην Κόρινθο, δηλαδή δεν είναι όλοι ικανοί για ένα δύσκολο στόχο.

모든 사람이 고린도까지 항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모든 사람이 어려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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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

제1기 : 기원전 1,800년 페니키아 인들과 왕래가 있었으며 미케네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이어 에올리안 민족이 대륙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2기 : 기원전 1,200년경부터 도리아 인들이 들어오기 시작, 900년경에는 도리아식 문화가 지배했다.

제3기 :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급속도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두 군데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께르끼라(또는 코르푸 CORFU 라고도 하는 섬)와 시실리섬의 시라쿠사가 그것이다. 

제4기 : 기원전 5세기경에는 그리스 도시국가들 가운데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 도시 중 하나였다(아테네, 스파르타, 고린도). 특히 페르시아와의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후에 '그리스의 자살'이라 불린 아테네와의 전쟁을 계기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고린도에서부터 시작된다. 

제5기 : 기원전 338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립뽀스 2세가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의 지도자가 된다. 그는 아크로고린도에 마케도니아 수비군을 주둔시켰다. 이후 계속 알렉산드로스 왕조의 통치 아래 있었다. 기원전 243년에 아르케안 동맹에 가입했는데, 이때는 동맹의 수도 역할을 감당했다. 이후 로마가 점점 강성해지며 세력을 확장하면서 기원전 146년에  로마 군대에 점령당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제6기 : 파괴된지 100여 년 후, 율리우스 시저에 의해 파괴되었던 그리스의 도시들을 복구하자는 계획에 따라  기원전 44년에 고린도는 다시 복구되기 시작했으며 '라우스 율리아 고린도'라 불려지게 되었다. 지리적인 이점으로 주변 지중해 연안 국가들과 무역이 활발하게 재개되었다. 가장 주목할만한 사항은 A.D. 50-52년에 사도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며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이다.

제7기 : 3세기경부터 로마제국이 야만족의 침입을 받기 시작하면서 고린도 역시 피할 수 없는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350년간의 터키의 지배 하에서는 아크로고린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과정을 겪으면서 고린도는 작은 시골의 한 촌락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이 남은 촌락마저도 1858년 대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후에 현재의 이스쓰모스 해협 부근에 새로운 고린도를 건설하였으나 1928년 또 한번의 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후에 다시 새로운 고린도(현재 인구 약 3만명)를 재건설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4. 유적지

음악당

주차장 쪽으로 나 있는 유적지 입구 건너편에 있는 이곳은 고린도가 번영하던 A.D.1세기에 건립되었으며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음악당이다. 225년에는 맹수들과 싸움을 벌이는 검투장으로 사용되었다. 이 음악당의 특징은 자연적인 돌을 이용해 객석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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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쁘기 우물

유적지 정문(주차장 쪽) 왼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진 집 형태의 건물로 끄레온다 왕의 딸이며 아르고 호 원정대장 이아손의 두 번째 부인의 이름인 ‘글라브끼’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샘은 그리스 도시들이 생겨날 때부터 계속 물이 솟았던 곳으로 현재의 모습은 로마인들에 의해 다시 축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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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 신전

 기원전 5세기경의 건축물로 도리아 양식으로 건축되어졌으며 기둥 하나 하나가 다 한 개의 돌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고린도전서 5장은 이러한 신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비도덕적인 행위들을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고대 신전들의 제관들과 무녀들은 창녀와 남창의 역할을 했으며 특히 아크로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한 때 몇 천명의 무녀들이 살면서 매춘을 했다. 또한 시장에 나오는 고기는 신전에 제물로 바쳤던 고기였기에 고린도 교회에서 우상의 제물로 드렸던 고기에 대해 먹어야 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의 논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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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연단)

 광장 중앙에 쌓여 있는 돌 더미로 본래 아고라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비마’라는 말은 ‘연단’, ‘보폭’이라는 뜻으로 사도 바울이 갈리오가 총독으로 있을 때에 유대인들의 고소로 재판을 받았던 자리이며 회당장 중 하나인 소스쎄니스를 잡아 매질을 한 곳이다. (사도행전18장)

 A.D. 5세기에 기독교인들이 이곳을 교회로 변형하여 사용했다. 이 비마에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4:17)라는 말이 그리스어와 영어로 새겨져 있다.

전문

 이 건물은 여러 시대에 걸쳐 다른 양식으로 축조되었는데 가운데 아치 형태의 큰 문이 있었고 양쪽에도 아치 형태의 작은 문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 문에는 황금으로 도금된 전차에 오른 일리오스(SUN)와 그의 아들 파에쏜(PHAETHON)의 청동상이 우뚝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는 돌무더기 몇 개만이 놓여 있을 뿐이다. 이 전문 주위에는 소나무와 아몬드 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순례객들의 땀을 식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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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해온 도로

 이 도로는 고린도 만에 있는 레해온 항구로부터 아고라까지 연결된다. 이 도로 주변으로 상점들과 신전들, 공공건물, 목욕탕과 샘이 있었으며 남아있는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건물 처마 끝에서 떨어진 빗물이 흘러가도록 배수에도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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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리니 우물

 이 우물은 고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사용되었다.

정원과 6개의 물 저장소(개당 400 큐빅의 용량)는 서로 통할 수 있게 되어있다. 헤롯 아티쿠스가 A.D 2세기경에 건립하였는데 지금도 이곳에 가면 물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전해지는 신화에 따르면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의 눈물이 오늘날까지 흐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결국 이 지역에 물이 귀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 우물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교훈과 고린도의 지리적 특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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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의 아크로폴리

 이곳은 ‘아끄로뽈리 띠스 꼬린쑤’(고린도의 높은 도시)라고 불리며 해발 575m에 자리잡은 곳으로 일명 ‘펠로폰네소스의 족쇄’라고 불릴 만큼 튼튼한 성채로 되어있다.

 이 성채 길이는 2km에 이르며 성채 안에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다. 여기서 제관과 천 명의 제녀들이 음란한 종교제의를 행했고 이 때문에 외국에서도 이곳을 찾을 정도까지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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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고학 박물관

 유적지 내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미국학교의 고고학부 아다 스멜 무어의 기증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아고라와 근처 마을에서 발굴 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1. 신석기 시대의 토기 파편들과 고린도 지협의 옛 거주지로부터 출토된 장식 조각들과 프레스코 파편들의 방

  2. 아르카잌 시대와 고전기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시된 방

  3. 로마, 비잔틴, 프랑키 시대의 동상들과 모자이크  방

  4. 고린도의 아스끌리삐오스(치료의 신) 신전 터에서 발굴된 조각 파편들 특히 환자들의 환부(눈, 귀, 코, 성기, 다리, 팔 등)를 모아둔 방

  5. 화랑의 부조물들을 모아 놓은 방

  6. ​로마시대의 동상들이 놓여있는 박물관 안뜰

6. 고린도 운하

 아테네 서쪽 78Km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꼬린씨아꼬스 만과 사로니꼬스 만을 연결시켜주는 운하로, 1881년에 착공하여 1893년에 완공되었다. 운하의 길이는 6.34km이며 상부의 폭은 25m, 하부의 폭은 21m, 수심은 8m 이다. 기원전 7세기에 뻬리안드로스가 운하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종교적인 반대에 직면하여 포기했다. 기원전 44년에 율리오스 깨사라스, 그 후에 깔리굴라스가 운하를 건설하려고 시도했으나 얼마 가지 못하여 중단되었다.

 고대로부터 여러 차례 운하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네로 황제는 수 천명의 유대인 노예를 투입해 공사를 시작했으나 A.D.67년에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고대에는 운하 대신에 돌로 포장한 길을 만들어 배를 수레로 끌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지렛대 등을 이용하여 배와 화물을 옮겨주는 ‘디올꼬스’(DIOLKOS)라는 돌길이 있었다. 고린도가 이 운영을 관장했기 때문에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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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스미아

 고린도 운하 근처에 있는 고대 지역으로 고대의 4대 경기중 하나인 이스쓰미안 경기가 열렸던 장소다. 신화에 따르면 아싸모스와 이노의 아들 멜리께르띠스를 기념하는 경기로 그의 어머니가 바다에 투신했을 때 돌고래가 어머니의 시체를 이쓰무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당시 고린도에는 기근이 심했는데 죽은 아이를 장사지낸 후 자녀를 위한 기념 경기를 열어야만 기근이 멈춘다는 신탁에 의해 경기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경기와 연관된 또 다른 신화는 뽀시도나스 신 또는 일리오스(태양) 시시포스 또는 씨세오스에게 명예를 돌리기도 한다. 첫 번째 경기는 기원전 582년에 열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올림피아드의 2년째와 4년째에 개최되었다.

 기원전 146년에 로마에 의해 고린도가 파괴될 때까지 경기가 개최되었으며 이후 시키온으로 운영권이 넘어갔으나 시저에 의해 고린도가 재건되면서 경기운영권도 다시 돌아오게 된다. 기원전 336년 경기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리스의 페르시아 원정군의 총대장으로 추대했으며, 67년에는 네로 황제가 참가하여 전차경기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8. 고린도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