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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테오라

현지명 : 메떼오라(ΜΕΤΕΩΡΑ)

1. 개요

 그리스의 절경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이곳은 거대한 바위들이 기둥처럼 100미터에서 150미터까지 솟아올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오래된 지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이곳 쎄살리아 지방이 하나의 갇힌 내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메테오라 산 정상에서  많은 물고기 형태와 바다 생물 화석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기암 괴석들은 바닷물이 급격하게 빠져 나가면서 지층의 변동으로 급하게 솓아 올랐다는 해석이 있다. 신화에 따르면 천상에서 열 받은 제우스가 던진 벼락이 이곳에 내려 꽂혔다는 이야기로도 전해진다.

2. 지명의 유래

Μετέωρα < μετέωροαρχαία ελληνική μετέωρος 

μετά + ἀείρω (=αἴρω)

αίρω< αρχ. αἴρω "σηκώνω" (들어 올리다)

메테오라 <유성 <고대 그리스 유성

메테오라라는 말은 중성 명사로 «공중에 메어 달린»이라는 뜻이다.

‘메테오라’ 라는 말은 ‘메테오로’의 중성 명사의 복수형태로 그 뜻은 “유성, 운석”을 말하며 형용사 형태로 쓰면 “공중에 메 달려 있는” 뜻이 되기도 하는데 영어의 기상학, 유성학, 기상학자, 관측소 등은 이 말에서 파생되었다.

기암 괴석 군 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이 장관을 이룬다. 최근 발견에 의하면 이미 13세기 초부터 수도사들이 모여 수도원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빠나기아 두삐아니(PANAGIA DOUPIANI)에 1336년 이전에 수도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최근 수도원을 보수하면서 발견된 증거와 벽화는 1200년 경의 작품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 시대부터 광야를 찾아 은거하던 수도사들이 이곳에 찾아와 조그만 처소를 마련하고 수도생활을 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즉 수도원이라는 조직을 가지고 단체 수도생활을 시작한 것이 대략 14세기 초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사실이 될 것이다. 당시 쎄살리아 지방을 점령했던 세르비아의 정교회 왕실의 많은 기부금으로 인하여 더욱 발전하게 되었고 터키 지배 당시에는 도피처의 역할을 했다. 수도원이 전성기일 때는 13개의 공동 수도원과(CENOBITE) 20여 개의 작은 거주처로 구성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에레미야스 1세가(1522-45) 수도원 가운데 여럿을 총대주교가 직접 관할하도록 조처했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사양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수도원은 6개이다. 까스뜨라끼에서 오르기 시작하면 아기오스 니꼴라오스 아나빱사스, 루사누(수녀원), 루사누 수도원을 지나 삼거리에서 왼쪽 편으로 오르면 당도하는 발라암(또는 아기온 빤돈), 메따몰포세오스 메갈로 메떼오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오른쪽에 따로 위치해 있는 아기아스 뜨리아도스, 그리고 방문하기에 가장 쉬운 아기우 스떼파누(수녀원) 수도원이 있다.

3. 수도원과 수녀원

Agios Nikolaos Monastery, Meteora.jpg

아기오스 니꼴라오스 또는 아나빱사스 수도원

 

깔람바까 마을에서 수도원 쪽으로 오르면 까스뜨라끼 마을에 당도하는데 이 마을을 지나면 메테오라의 첫 번째 수도원이 보인다.

이 수도원은 높이 85m의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아나빱사스’라는 명칭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나빠브오’(내가 쉬다) 라는 동사의 과거형이 명사화 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있고, 은수사들이 이곳 바위에서 휴식을 취한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수도원 건립에 재정적 지원을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이곳에서 발견된 성화들은 13세기 또는 14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도원은 1510년 몇 해 전에 라리사 지방의 주교좌 교회로부터 온 성 니꼴라오스와 나까노라가 무너진 수도원 위에 새로 건립했다.

1960년 경 수도원이 황폐해지고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보수가 시작되었다. 1961년도에 특별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곳 성화들을 보수했다. 성 니꼴라오스 교회와 세례 요한의 작은 예배당을 제외하고 1972년도에 새롭게 단장하여 옛 명성을 되찾아 가고 있다.

특히 이 수도원의 성화들은 1527년 크레테 섬에서 온 쎄오파니 스뜨레리자(또는 바싸)의 작업에 의해 이루어졌다. 크레테에서 배운 성화 기법을 잘 살려서 이데아적이고 감성과 환기성, 손과 움직임의 유지와 절제, 그리고 얼굴과 상태의 유연함과 친숙함이 아주 빼어나게 표현되어 있다. 성화 가운데 아주 훌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동물들의 이름을 명명하는 “에덴에서의 아담”으로 색감과 구도의 완성도가 성화 전체에 나타나 있다. 또한 이 성화 위에 있는 “에브라임의 수면”, “빤또끄라또라”(전능자라는 뜻), “재림” 등의 성화는 진한 감동을 가져다 준다.

루사누 수도원

 전체 수도원 가운데 가장 작지만 깎아 지르듯 솟아오른 바위에 세워진 이 수도원은 주위의 자연적 경관과 더불어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루사노’라고 명명된 이 수도원의 기원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루사누 또는 루사노라는 이름은 수도원의 첫 번째 설립자로 알려져 있는 ‘루사노스’에서 유래했거나 쎄살리아 지방의 로사나 마을로부터 온 은수사에 의해서 설립되었기에 루사누라고 명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수도원은 1545년 이전에 그리스의 북부 지역인 이삐로스 출신인 막시모와 요아샆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전승이 있으며, 수사 니꼬디모와 베네딕또가 1288년에 세웠다는 전승도 있다. 수도원의 본당은 “구세주의 변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주 작은 이 교회는 성 발바라에게 바쳐진 것으로 성화들은 1561년도에 크레테적인 기법으로 그려졌다. 성화의 보존 상태는 매우 훌륭하며, 특히 순교하는 장면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숭고함을 절로 가지게 만든다. 

옛날에는 사다리를 통하여 오르거나 나무로 다리를 놓아 다녔으나 1936년 수도원 곁에 솟아오른 두 개의 높다란 바위에 반영구적인 다리를 설치했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까스뜨라끼 마을의 처녀 다프니 바까가 희사했다.  폭설과 비바람 등의 자연적 현상에 의해 손상된 다리를 2000년도에 철제 빔을 넣은 시멘트 콘크리트로 보수 설치했다.

안타깝게도 이곳에 있던 성화와 사본 등의 많은 유물들은 1941-1944년 사이에 약탈을 당하였다. 현재 이 수도원은 수녀들의 기도처로 사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수도원 옆에 숙소를 크게 짓는 바람에 이곳 경관이 손상되었다. 

Roussanou monastery at Meteora at sunset
Great Monastery of Varlaam on the high r

발라암 수도원

높이 373m의 바위 위에 건립된 이 수도원은 본래 4개의 사다리를 이용하여 오르도록 되어 있었는데 한 사다리에는 25칸의 층계가 있었다고 한다. 후에는 그물로 된 망을 이용했으며 이 그물망은 오늘날에도 식량 운반 등 수도원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

현재 방문객들은 1923년도에 설치된 195개의 계단을 이용하고 있다.

 1350년도에 발라암 이라는 수도자가 이 바위에 올라 ‘뜨리스 이에랄헤스’(세 사제들이라는 뜻)를 위한 작은 성소와 몇 개의 방을 지었다. 수도원의 이름은 그 수도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세월이 지나며 수도원도 황폐해 졌는데 요안니나 출신인 넥따리오스와 쎄오파니스 형제가 1518년에 수도원을 재건했다. ‘뜨리스 이에랄헤스’를 재건하고 곧이어 ‘아기온 빤돈’(모든 거룩함의) ‘아기우 요아니 뚜 쁘로드로무’(예비자의 성 요한) 성소를 지었다. 이 발라암 수도원에는 나무로 만든 함들이 많이 있는데 그 속에는 많은 사본들과 풍부한 보물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많은 필사본 중 한 복음서 사본에는 비잔틴 황제인 뽈피로겐니또스(912-956) 의 사인이 있는 것도 있다. 독일, 이태리, 불가리아의 점령시기인 1941-1944년에 수도원은 계속적으로 약탈되고 황폐해 졌다.

 그 후 1961년도에 이르러 수도원이 다시 정비되고 그 때부터 수도원의 명성은 차츰 회복되기 시작했다. 성소의 벽과 나무 등에 그려진 성화들은 시대와 작가에 따라 약간씩 다른 모습과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1548년 테베 출신 프랑꼬스 까뗄라노스가 이곳에 남긴 성화들은 사실적이다.이태리적인 것에 자신의 개성을 가미하여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갈로 메테오론 수도원

 메테오라 수도원들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가장 넓은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수도원의 규모 역시 가장 크며 오래된 수도원이다.

그래서 ‘메갈로’(큰, 위대한)라는 말이 앞에 붙는다. 

 이 바위의 높이는 해발 613m, 삐니오스 강으로부터 473m, 깔람바까 마을의 중심지로부터는 413m에 이르며 정상의 면적은 50.000㎡ 이다.

 방문객들이 오르게 되는 높이는 통상적으로 250m까지이다. 전에는 그물과 사다리를 이용했다. 1923년도에 146개의 계단이 만들어지고 하나의 굴로 된 통로가 만들어져서 수도원 방문이 매우 쉬워졌다.

메갈로 메떼오론 수도원을 처음 창설한 사람은 메테오라 출신으로 알려진 아싸나시오스(1303-1382)로 ‘쁠라띠 리쏘’(넓은 돌이라는 뜻)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는 본래에 이빠띠(새로운 빠뜨라 지역) 태생으로 16세가 되던 1319년도에 프랑키(FRANK, GAUL 사람을 정복하여 프랑스 왕국을 세운 사람들) 인에게 포로로 잡혀 가다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이 지역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싸나시오스와 함께 수도원을 창립한 사람은 요아사프이며 본래 그는 세르비아의 왕 시메온(1355-1375)의 아들이다. 원래의 이름은 요아니스 우레시스 빨래오로고스이다. 아싸나시오스, 요아사프 이 두 수사는 정교회로부터 ‘아기오스’(성인)로 추대되어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다. ‘메따몰포시 뚜 소띠라’ 예배당은 1382년도에 아싸나시오스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1388년도에 요아사프에 의해 증축되었다.

1483년 현재 강단 쪽 벽에 있었던 작은 본당에 처음으로 성화가 그려졌다. 본당은 메테오라의 건축물 가운데 으뜸이며 그리스의 빼어난 교회 건축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1552년에는 크레테 출신의 위대한 성화가로 알려져 있는 쎄오파니도 이곳에 많은 성화를 남겼다. 수도원의 옛 식당(길이 35m, 넓이 12m)은 오늘날에는 박물관처럼 사용되고 있으며 값진 유물들(필사본, 이콘, 나무조각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바로 옆에는 부엌이 있다.

 수도사 다니일(DANIEL)이 14년에 걸쳐서 직접 손으로 만든 나무로 된 십자가 조각상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유물로 알려져 있다.

 이 메갈로 메떼오로 수도원 도서관에는 여러 종류의 고서들과 뻴가미네스(PARCHMENTS, 양피지들) 사본 등이 550권에 이르고 있다. 1908년에 비잔틴 학자 니꼬스 베이스에 의해 그 동안 감추어 있었던 819점의 옛 문서들이 발굴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돌계단이 끝나는 수도원 입구 왼쪽 아래 부분에 하나의 작은 동굴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성 아싸나시오스가 14세기에 수도원을 건립하기 직전에 거주하며 수도에 정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수도원에는 수사들의 유골이 모셔져 있는데 그 가운데 붉은 색조의 유골은 포도주를 자주 드셨던 분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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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테오라 수도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바위 위에 건립된 수도원이다.

이 바위의 높이는 65-100m 이고 정상의 면적은 5-6.000㎡ 에 이른다.

그 동안 그물과 사다리를 통하여 오르다가 1925년도에 설치된 140개의 계단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방문이 안전하고 쉬워졌으나 상당한 체력이 요구되는 곳이다. 이 아기아 뜨리아다 수도원은 수도자 도메띠오스에 의하여 1438년(다른 전승에 따르면 1476년)도에 설립되었으며 아기아 뜨리아다 교회당은 1689년 이후에 건립되었고, 1692년에 이르러 성화가 그려졌다. 역사적인 자료들과 방문객들의 기록에 의하면 여기에 수도원을 짓기 위해 70주간에 걸쳐서 그 재료들을 운반했다고 한다.

 필사본과 성화 등 오래되고 값진 자산들과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왔으나 1941-1944년 사이에 심한 약탈과 파괴를 당하였다.

 그 사이에 수사들은 죽거나 흩어지는 곤욕을 겪었고 1942년에서 1961년도 사이에 집중적으로 황폐해지고 한 늙은 신부만 남게 되었다.

1970년도에 물건을 운반할 수 있도록 ‘뗄레페릭’(케이블 카)이 설치되고 1972년도에 이르러 본격적인 재건이 이루어 졌다.

1979년도에는 옷감으로 장식된 ‘그리스도’라는 이콘 등과 유물들이 도난 되었는데 여기에도 뗄레페릭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수도원에는 “예비자 요한” 이라고 명명된 작고 조그마한 성소가 남아 있는데 1682년도 지어진 것이다.

아기아 뜨리아다 (성 삼위) 수도원

성 스떼파노스 수도원

 메테오라의 가장 남쪽 바위 위, 그림 같은 깔람바까 마을의 바로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일명 깔람바까의 전망대로 불리는 수도원이다.

 이 바위는 꾸꿀라 산으로부터 깊고 좁은 협곡을 사이에 두고 자리하고 있는데 그 간격은 8m이며 여기에 다리를 놓아 하나로 연결시켰기에 수도원의 방문이 가장 용이하다. 이 바위 정상의 면적은 7.500이다. 전승에 의하면 이 바위 위에 1192년부터 사람들이 주거했으며 14세기에 이르러 수도원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안드로니꼬스 빨래오로고스(1328-1341)가 1333년 이곳에 머물었었는데 그가 여기에 많은 재물과 건물을 희사했으며 그 후부터 ‘바실리끼’(황실)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헝가리의 지도자 요안니스 불라디스라오스 또한 수도원에 많은 것을 기증했는데 그 가운데 값진 나무들, 특히 루마니아에 있던 예비자 세례 요한의 유골로 알려진 손가락 유골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귀족 보르니꼬스 드라구미로스라는 사람은 성 하라람보스의 두골을 기증했다고 전하고 있다.

 1545년에는 꼰스딴띠누뽈리의 총대주교 에레미아 1세가 이곳에 ‘스따브로삐기오’(십자가 기원)를 하사했고 이 수도원을 총대주교의 관할하에 두었다. 성 스떼파노스 수도원에는 두 개의 성소가 있다. 오래되고 작은 성 스떼파노스 교회는 1350년에 세워졌으며 16세기에 니꼴라오스에 의해 성화가 그려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성화들은 1943년도에 파괴되고 말았다. 보다 큰 성소는 성 하라람보스에게 바쳐진 교회로 1798년도에 지어졌는데 이곳에서 많은 필사본들이 발견되었다.

 1881년에는 31명의 수도사들이 있었으나 1960년도에 황폐해졌고 1961년도에 수녀원으로 바뀌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는 비잔틴 성화들과 비잔틴 성가 등을 제작 판매하고 있다.

이 수도원의 정원 쪽에서 깔람바까 마을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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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메테오라 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