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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현지명 : 쎄살로니끼(θεσσαλονίκη)

1. 성경

사도행전 17 : 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2. 지명의 유래

Θεσσαλονίκη < αρχαία ελληνική Θεσσαλονίκη, το όνομα της πόλης, από το όνομα της αδελφής του Μεγάλου Αλεξάνδρου

 데살로니가는 카산드로스(Cassander)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의 아내 테살로니키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자매이자 필립 2세의 딸이다. 테살로니키는 카산더의 다섯 번째 아내이다. 데살로니가라는 지명은 그 아내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데살로니가는 로마 시대의 비문과 동전에서도 나타난다. 오스만 제국이 정렴한 후 라틴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이 도시에 정착했다. 한편,  이 지명은 폭군 정권 페라(Fera)와 포카에아(Phocaea) 동맹군에 대항한 마케도니아와 테살리(Thessaly) 연맹의 승리를 기념한데서 유래한다(Thessaly와 Victory라는 단어에서 유래). 철자와 음성학적 변형에 따라 지명이 다양하게 표시되기도 한다. 데살로니가라는 지명은 헬레니즘 시대에 자연스럽게 정착되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의하면 헬레니즘 시대의 보고서에 "데살로니끼(Thettaloniki)"라는 지명이 나온다고 한다. 

 데살로니가는 아테네 북쪽 513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쎄살로니끼’ 또는 ‘쎄살로니까’라고 발음하며 또는 단순히 ‘살로니끼’ 라고 부르기도 한다. 약 1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그리스 제 2의 도시이며 발칸 반도에 위치한 여러 동구권 국가들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상공업과 교육이 발달한 항구도시다. 현재 모습은 1917년에 있었던 대화재로 인해 도시가 파괴된 후 새롭게 재건한 모습이다. 

 데살로니가 대학(정식 명칭은 ARISTOTELIAN UNIVERSITY OF SALONIKA)이 자리잡고 있으며, 해마다 개최되는 국제 박람회가 유명하다.

3. 역사

  ‘쎄르메’(THERME)라는 도시가 기원전 316년 카산드로스(KASSANDER)에 의해 주변 25개의 도시와 합쳐졌다. 카산드로스는 자신의 아내 이름을 따서 도시를 개축하고 데살로니가로 명명하였다. 이후 B.C. 274년 안띠고노스 고나따스(ANTIGONUS GONATAS)가 이삐로스(EPIRUS)의 왕 삐로스(PYRRHUS)에게 패한 후 데살로니가에 정착하며 도시를 강화시켰다. B.C. 146년에 마께도니아 지방이 로마에 귀속되면서 데살로니가는 마께도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도시에 접하고 있는 해변이 항구로 이용되고 ‘에그나띠아 길’(VIA EGNATIA)이 건설되면서 도시 발전은 한층 가속화되었다. 역사적 인물들의 도피 장소나 거주지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면 키케로(CICERO)는 유배 생활을 여기서 보냈으며(B.C. 58) B.C. 49년 폼페이우스(POMPEIUS)도 시저를 피해 이곳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사도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때 복음을 전한 곳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두 편의 서신을 기록했으며 후에 다시 한번 더 방문했다.

 B.C. 3세기경에는 고트 족의 계속된 침입을 굳건히 막아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를 이어 로마제국의 동쪽 절반을 차지한 갈레리우스(GALERIUS)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후에 데살로니가의 수호성인이 된 성 디미뜨리오스(ST.DEMETRIUS)가 순교한 곳이다.

 324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마지막으로 리키니우스(LICINIUS)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 함대를 집결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THE GREAT 379-395) 황제에 의해서 일리리움 관할지(PREFECTURE OF ILLYRICUM)의 수도가 되었고, 주교 좌(METROPOLITAN)가 설치되었으며 고트 족에 대항하는 제국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 되었다. 여기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중병에 걸린 이후 기독교인이 되면서 데살로니가 칙령(EDICT OF THESSALONICA, 380)을 반포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에 의해 용인되었던 이교숭배를 금지하고 아리우스 이단을 정죄했다(381, 콘스탄티노플 제 2차 세계교회회의).

 390년에 이 도시의 군사령관이었던 고트 족의 장군 보세릭(BOTHERIC THE GOTH)이 난동을 일으킨 군사들에게 린치를 당한 후 보복 조치로서 7천 여명의 시민들을 이뽀드롬(HIPPODROM)에서 학살했다. 이 사건으로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와 충돌했고, 보세릭은 공개사죄를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US) 때는 비잔틴 제국의 제 2도시가 되었으며 계속되는 고트 족의 침입을 견디어 냈다. 또한 아바르(AVARS)족과 슬라브족이 다섯 번이나 침략했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데살로니가는 슬라브 족에게 그리스 문자를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슬라브 인들의 사도라 불려지는 그리스 태생의 키릴로스(CYRIL)와 그의 형 메쏘디오스(METHODIUS)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904년 사라센 족의 침입에 의해 약 22.000명의 주민이 노예로 팔려갔으며, 바실 2세(VASIL 2)때는 데살로니가를 공격한 불가리아 인들을 막아냈다. 1185년에는 시실리의 윌리암 2세(WILLIAM 2 OF SICILY)의 군사와 함대에 의해 점령되었고 점령자들의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당시의 학자인 에프스타씨오스(EUSTATHIOS)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지고 있다. 제 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보니페이스(BONIFACE OF MONTFERRAT, 1240)에 의해 라틴왕국의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13-14세기에 이르러 이 도시의 지배자가 여러 차례 바뀌고 비잔틴 제국이 제 4차 십자가 원정으로 힘을 잃은 뒤부터 데살로니가는 매번 다른 모든 제국의 첫 번째 함락 대상이 되었다.  4세기에 있었던 두 차례의 비잔틴 제국 내전 때에 중요 거점도시로서 이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신학논쟁이 바로 이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신학논쟁은 그리스 전 교회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1341년과 1343년에 연이어 열린 콘스탄티노플의 회의에서 헤시카즘(HESYCHASM)이 정교회의 중요한 교리로 공인되었다. 상당 기간 동안 무정부 상태를 유지하다 결국 1387년에 오스만 터키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 후 1403년에 베이에지드(BAYEZID) 1세가 몽고의 티무르(TIMUR)와의 전투(앙카라 전투)에서 패배함으로 일시적으로 다시 비잔틴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1430년 무라드(MURAD) 2세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다.

 1492년에 반포된 알함브라의 칙령(EDICT OF ALHAMBRA)에 의해 스페인에서 약 20.000명의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에 정착하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에는 이미 20년 전 바바리아 지방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여기에 스페인에서 온 유대인들과의 합류로 인구가 증가되고, 16세기에는 이들이 도시의 주요 인구 구성원이 되었다.

 1821년에 그리스의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데살로니가에서는 무자비한 탄압이 발생했다. 19세기 데살로니가는 터키와 그리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특히 그리스인들은 교육(학교설립)을 통하여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갔다.

 제 1차 발칸 전쟁 당시 간발의 차로 불가리아 군사들보다 그리스 군사가 먼저 도시에 입성하였고, 부쿠레우스트 협정(1918년7월28일)에 의해 영구적으로 그리스 영토로 귀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에 점령당해 당시 데살로니가에 거주하고 있던 약 6만 명의 유대인들이 폴란드로 강제 이송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1917년에 일어난 대 화재에 의해 도시는 큰 피해를 입었다. 1923년부터 터키의 이즈밀 등의 지역에서 피난 온 그리스계 주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도시의 재개발이 이루어졌다(1925-35). 1950년 이후 급격히 발전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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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적지

오 레프꼬스 삘고스(WHITE TOWER)

 이 탑의 높이는 32m이며 1430년에 베네치아인들(다른 견해로는 터키인들)에 의해 신속히 건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세 때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성채였다. 18-19 세기에 터키인들에 의해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1826년에 마흐메드 2세의 명령에으로 자행된 엄청난 학살로 "피의 탑"이라고 불려 졌으며 주민들은 이를 ‘레프꼬스 삘고스’(WHITE TOWER)라고 부르는 대신에 ‘꼭끼노 삘고’(RED TOWER)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재는 박물관과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카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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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앞시다 갈레리우(ARCH OF GALERIUS)

 A.D. 297년에 갈레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개선문으로 1939년 덴마크의 고고학자 어네스트 디글레(E.DYGGRE)에 의해 발굴되었다. 궁정, 히포드롬, 무덤 등으로 구성된 건축물 가운데 일부분이며 아치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편 반쪽이며 동편은 소실됐다.

 이 문에 새겨진 부조의 주제는 희생제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과 전투장면으로 갈레리우스 황제가 주인공으로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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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똔다(ROTUNDA)

 갈레리우스가 그의 무덤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건축했으나 후에는 아기오스 요르기오스(ST. GEORGIOS)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터키 점령 시기에는 모스크(회교사원)로 사용되었다.

 이곳에는 로마 시대와 옛 기독교 시대의 조각물들과 건축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지진 피해로 폐쇄되어 복원 수리 중이며 현재 내부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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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광장

 아리스토텔레스 거리는 데살로니가의 중앙 광장 중 하나다. 미트로폴레오스 거리(Mitropoleos Street) 북쪽에 있는 반원형 건물에서 시작하여 이 지점을 건너 니키스 에비뉴(Nikis Avenue)와 바다까지 이어진다. 광장은 식당과 카페가 많아 관광객과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정치 모임과 다양한 예술 행사를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 미트로폴레오스 거리에는 호텔과 "올림피온(Olympion)"영화관이 있다.

 프랑스 건축가 어니스트 엠프라(Emprar)는 1917 년 데살로니가의 큰 화재 후에 광장을 설계했다. 알렉산더 대 광장이라고 불리는 광장 중앙에 알렉산더의 큰 동상이 있고 에그나티아(Egnatia) 북쪽에서 끝난다.

 아리스토텔레스 거리는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엠프라가 설계한 대로 베네치아, 비잔틴 및 아랍적인 요소를 유지하고 있으며 최종 구성은 1960년대에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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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기오스 디미띠리오

(ST. DEMITRIOS CHURCH)

 

 이중회랑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5세기에 건축된 교회다. 그 길이는 43.58m, 넓이는 33m 이며 돔이 없는 높고 긴 직사각형 형태를 지녔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교회이며, 1917년 대 화재 때 소실된 것을 1926-48년에 남은 자재를 이용하여 복원했다. 이 교회는 데살로니가에서 출생하고 갈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한 디미뜨리오스(DEMITRIOS)를 기념하는 교회로, 후에 그는 데살로니가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이 성인의 놀라운 기적으로 여러 번 야만인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었다고 역사가들이 전하고 있으며 주민들 역시 그렇게 믿고 있다. 그의 무덤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이 병자들을 치유했다고 한다. 

 처음 이 교회는 밀란 칙령 이후에 소박하게 세워진 교회였는데, 412-413년 일리리쿰의 총독(PERFECT) 레온티우스(LEONTIUS)의 중풍이 기적적으로 치료된 후에 크게 확장되었다. 그 이후 한 번 더 확장되었고, 헤라클리우스(HERAKLIUS, 629-34) 통치 때에 소실된 것을 다시 크게 건축했다. 1430년에 교회가 약탈된 적이 있다. 하지만 1491년까지 기독교인들에 의해 교회 내부가 수리되었다. 이후 1491년 술탄 BAYEZID 2세(1482-1512)에 의해 ‘까시미에 자미’(KASIMIYE CAMI, 회교사원)가 되었다. 1907-1912년 사이에 교회는 다시 기독교인들에게 넘어갔다. 교회 안에 들어 서면 왼쪽 중간 부분에 성 디미띠리오스의 성골함이 안치되어 있으며 지하에 내려가면 옛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성인의 유골은 중세 때 한 신부에 의해 옮겨져서 이태리의 캄포(CAMPO) 마을에 있는 성 로렌조(ST. LORENZO) 성당의 강단 밑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해마다 10월 26일은 하기오스 디미띠리오스의 날로 지켜지고 있으며 이 날은 데살로니가의 대대적인 축제로 많은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6. 고고학 박물관

 

 1963년에 개관된 박물관으로서 데살로니가를 중심으로 발굴된 유물과 마께도니아와 쓰라끼 지방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신석기와 철기 시대의 유물과 아르카잌기, 고전시대, 헬라와 로마 시대의 건축자재와 조각상, 청동 유물들은 눈여겨 볼만하다.

 델베니온 전시실(입구 왼쪽)에는 데살로니가의 외곽 10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델베니 무덤들에서 발굴한 많은 부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끄라띠라스’(CRATE)라고 부르는 청동 상자가 유명하다.

 상자 겉 부분에는 금으로 도금이 되어 있으며 그 주제는 디오니소스와 아드리아드니의 결혼이다. 높이는 0.91m이고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최근에 벨기나에서 발견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립뽀스 2세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유적지에서 발굴된 여러 중요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8.24Kg이나 되는 태양문양의 황금 상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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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노 폴리

 

 데살로니가의 아노 폴리(Ano Poli)는 큰 경사면의 바위 바닥이 있는 언덕에 지어졌다. 그것은 아기우 디미트리우 거리(Agiou Dimitriou Street)의 북쪽에서 아크로폴리스-엡타피르기우(Acropolis-Eptapyrgiou)의 벽까지, 동쪽으로는 엘레니 조그라푸 거리(Eleni Zografou Street)의 벽에서 무슌티 광장(Mouschounti Square /Old Lachanagora)의 서쪽으로 이어진다.

 이 지역에는 엡타피르기오(Eptapyrgio), 성 다비드(Saint David) 교회 (Latomos Monastery), 아기오스 니콜라오스 오르파노스(Agios Nikolaos Orfanos)교회, 블라타다(Vlatada) 수도원, 아기아 이카테리니(Agia Aikaterini) 교회, Profitis Ilias 교회, Kris Square의 비잔틴 목욕탕과 같은 중요한 기념물이 있다. 아타튀르크 박물관, 투르 베 무사 바바, 치나리 분수 등이 있으며 데살로니가 전체를 조망하여 볼 수 있는 곳이다.

 오스만 시대에 투르크 인들은 그곳에 살았고 그리스인, 서유럽인, 그리고 도시의 유대인 거주자들은 항구 주변에 살았다. 이 지역은 19 세기 말, 특히 소아시아 난민이 유입된 이후에 인구 밀도가 높아졌다.

 역사적인 기념물 외에도 아노 폴리 지역에는 좁은 자갈길, 막다른 골목, 작은 숲과 광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우아한 건물과 함께 정통 도시 직물이 많은 부분 보존되어 있다.

 Dimitrios Poliorkitos, Alexandras Papadopoulou, Theofilos, Antiochos, Amfitryonas, Herodotus, Tsamadou 및 Sachtouris의 거리에서 주로 발견되는 주택들은 형태와 기능적(내부 및 외부)으로 많은 부분에서 고대 그리스와 비잔틴 전통을 계승한다. 이 주택들은 전통적인 마케도니아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인 "돌출부"(sahnisia, 비잔틴의 "태양"), furousia (돌출부의 지지대), 덮힌 발코니 ("loggias")로 구분된다.

 아노 폴리의 주택 양식의 특징은 소아시아에서 온 난민들이 지은 성에 휩싸인 주택들이다. 이 집들은 비잔틴 성벽에 인접해 있으며, 도시에 있는 난민들의 빠른 정착을 보여준다. 이들은 좁은 공간에 집을 짓기 위해 벽 옆에 작은 1층 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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