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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덴

현지명 : 아씨나(ΑΘΗΝΑ)

1. 성경

사도행전 17장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 지명의 유래

 여신의 이름으로 Ἀθανα (Doric)와 νηθήνη 로 불렸는데,  Ἀθηνᾶ라는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이름은 Ἀθηνάα> Ἀθηνάα> ᾶθηνᾶ과 동의어인 형용사 Ἀθαναία에서 유래했다. Στον πλατωνικό Κρατύλο το όνομα Αθηνά ετυμολογείται από το Α-θεο-νόα ή Η-θεο-νόα, δηλαδή η νόηση του Θεού (Κρατυλ. 407b) 플라토닉 크라틸로스(Platonic Kratylos)에서 아테나(Athena)라는 이름은 A-theo-noa 또는 H-theo-noa, 즉 신의 지성 (Kratil. 407b-c)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또 다른 문헌은 그 이름이 그리스 이전의 이름이고 어원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Αθήνα(아씨나)는 아테네 시(City)를 의미하며 Αθηνά(아씨나)는 아테네 여신을 의미한다. 현대에는 여성 이름에 많이 쓰여진다. 철자는 같으나 ‘또노’(엑센트)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아테나는 에트루리아 사람들과 그들의 여신 미네르바(Menrva)와 관련이 있다. 나중에 로마인에 의해 Minerva로 불리게 되었다. 아테나의 아버지는 아테나에게 아에기스(Aegis)라는 염소 가죽 방패를 주었고, 아테나는 니케(Nike) 여신과 함께 했다. 아테나는 종종 영웅을 도왔다. 그녀는 무장한 처녀였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가장 유명한 신전이다. 

 그리스의 수도이며 인구 약 370만 명 정도의 도시다. 그리스가 독립한 후인 1834년에 임시 수도였던 나프쁠리오(NAFPLIO)에서 아테네로 수도가 옮겨지면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1950-60년대에 농촌의 인구가 급속도로 유입되면서 그리스 전체 인구의 35%가 집중되어 있는 대도시가 되었고, 이에 따라 다른 대도시처럼 주거, 교육, 환경, 교통, 공해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3. 인구 및 면적

지역면적

 • 총 3,808km²

 • 순위 12 위

 • Geog. 위도 38 ° 4′59.88 ″ N

 • Geog. 경도 23 ° 30′0 ″ E

인구

 • 총 3,828,434 (2011 년 인구 조사)

 • 인구 순위 1 위

 • 밀도 987.9 cat./sq.km.

 • 밀도 분류. 1 위

 • Parnitha의 최고점 해발 1,41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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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

 아크로폴리 언덕을 중심으로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영웅 테세우스(THESEUS)에 의해 여러 촌락이 연합되어 한 도시국가를 이루었다는 신화의 기록이 있다. 중기 헬라딕 시대부터 숭배되고 있던 뽀시도나스(포세이돈) 신과 함께 아크로폴리스(ACROPOLICE)에서 아테나 여신도 숭배하기 시작했다.

 도리아 인의 침입(B.C.12-11)으로 아테네는 이후 3세기 동안 암흑시대를 보냈다. B.C. 8세기에 이르러 암흑시대에서 벗어나 그리스의 새로운 패권자가 될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암흑시대라고 해서 아무런 문화활동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가 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는 미래를 위한 은밀한 태동기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 유물로는 기하학적 도형(GEOMETRIC)의 도자기와, 묘지의 장식품 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 문자다. 페니키아 인들을 통해서 유입된 페니키아 문자가 그리스 문자로 변형되어(B.C. 9)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어의 기원에 관하여는 미끼네 등지에서 발굴된 B선 문자 등에 의해 새로운 이견이 많이 제시되고 있어 종래의 페니키아 문자의 차용이라는 학설이 줄어들고 있다).

 B.C. 6세기에는 아르카익(ARCHAIC) 시대로 아테네는 에게 해의 여러 섬으로부터 조각 등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다. 고대의 7현인 <린도스 출신의 끌레오불로스(KLEOBOULOS), 아씨나의 솔론(SOLON), 스빠르띠의 힐론(CHILON), 밀리또스의 쌀레스(THALES), 레스보스(미틀리니)의 삐따꼬스(PITTAKOS), 쁘리에네의 비아스(BIAS), 꼬린씨오스의 뻬리안드로스(PERIANDROS)> 가운데 하나인 솔론(SOLON)에 의해 도시가 새롭게 정비되어 재정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B.C. 570년부터 권력을 잡은 독재자 삐시스뜨라또스(PEISISTRATUS) 가문이 아테네를 지배하면서 비록 정치적으로는 자유를 누리지 못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한층 발달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삐시스뜨라또스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개최하여 아테네가 연극의 요람지가 되는 기틀을 세우면서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또 그에 의해서 재조직된 빤아씨나이꼬(PANATHINAIC) 제전은 올림픽 경기나 삐씨안(델피에 있었던 경기) 경기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으며, 그의 지배기간 동안 아테네에서 발전된 흑요식 도자기(BLACK FIGURE)는 전 그리스와 해외 여러 지역으로 수출되는 무역의 주요한 상품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에 대항해서 일어난 이오니안 반란은 전 그리스를 전쟁의 한 복판으로 끌어들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테나는 두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와의 전쟁(B.C. 490년의 마라톤 전쟁과 480년의 살라미나 해전)을 통해 전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B.C. 476년에 딜로스(DELOS, 끼끌라데스 제도에 있는 섬) 동맹이 결성되고, 최종적으로 에우리메돈(EURYMEDON)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격퇴시킴으로 페르시아의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B.C. 454년에 동맹의 금고가 딜로스 섬에서 아테네로 옮겨지게 되면서 아테네의 황금시대(GOLDEN AGE)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페리클레스(PERICLES)의 지도 아래 오늘날 아크로폴리스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유적들이(아고라에 위치해 있으면서 현대에 씨시온(THESEON)이라 불려지는 헤파이스토스(HEPAISTUS, 대장장이 신) 신전, 수니온의 포세이돈(POSEIDON) 신전 등) 건축되고, 고대 문화가 최고의 절정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약 30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 중 뛰어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가 열병으로 죽고(B.C. 429년), 시실리의 원정이 참담한 패배로 끝난 후, 아테네의 세력과 영향력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고, 스파르타가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씨배(THEBES, 테베)와 연합하여 스파르타를 격퇴하고 잃었던 세력을 잠시 회복했으나, 북쪽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새로운 세력인 필립뽀스 2세의 마께도니아 제국에 의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그전과 같은 영향력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칙령에 의해 아테네의 철학학교가 폐쇄되기 전까지 아테네는 정치적으로는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그리스와 당시 로마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를 계속 점하고 있었으며, 특히 아테네의 철학학교는 당시 세계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당당하게 감당해 나갔다. 로마의 명망가 집안의 자제들은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학교에서 교회의 대 바실리오스와 나찌안쭈스의 그리고리오스가 수학했으며, 후에 배교자 율리안으로 알려진 꼰스딴띠누스의 조카도 이곳에서 수학했다.

 비잔틴 시대의 아테네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그저 지방의 한 도시로 전락하여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신전들은 기독교 교회로 사용되었다. 1204년 라틴인들에 의해 꼰스딴띠누뽈리스(이스탄불)가 함락되면서, 아테네 역시 라틴인들에 의해 1456년 오스만 터키 제국에 병합되기까지 지배를 당했다. 약 400년간 오스만 터키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특이할 만한 사실은 라틴인들의 지배 기간 동안 폐허가 되었던 동방정교회가 다시 자리잡게 된 것이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이후에 유럽에 팽배해진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1821년부터 독립항쟁이 전개되어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지원 하에 1830년 2월 런던의정서에 의해 독립이 보장되었으며 3월25일 독립국가가 수립되었다. 근대국가 형성기간(1830년-1913년)에 외세의 내정간섭이 지속되었고, 오토(OTTO)1세 치하(1830-1863년)를 지나 조지(GEORGUE) 1세 치세 기간인 1863년 의회에서 민주적인 헌법이 채택되어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발칸전쟁(1912-1913)을 통하여 영토를 회복하였으나 왕당파와 공화파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1941년 1월부터 1944년 10월까지 독일, 이태리, 불가리아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독일 패망 후에 주권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그 후 1967년 4월 요르고 빠빠도뿔로스(GEORGE PAPADOPOULOS) 육군대령을 중심으로 한 좌익 군부에 의해 무혈 쿠데타가 발생하여 군사정권이 수립되고, 디미뜨리오스 요안니디스(DEMETRIOS IOANNIDES) 헌병 준장에 의한 역 쿠데타가 1973년 11월에 일어났다. 1974년 12월 국민투표에서 입헌군주제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현재는 신민당 집권기간을 거쳐 사회당이 정권을 잡고 있으며, 1999년에 실시된(1999.6.13) 유럽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이 가장 많은 득표를 하였으나, 2000년 4월 9일에 있었던 총선에서는 다시 사회당이 0.9% 차이로 신민주당을 이기고 재집권을 창출해냈다. 현재(2020년)는 네아 디모끄라띠아(신민주당)가 정권을 잡고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5. 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

‘아끄로뽈리’라는 말은 희랍어의 ‘아끄로’(높은 장소 또는 꼭대기)와 ‘뽈리’(도시)의 두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로서 종합적으로는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를 또는 마을을 의미한다. 고대의 그리스의 강성 했던 도시국가에는 이러한 아끄로뽈리가 있었다. (비근한 예로 미끼네, 알고스, 나프쁠리오, 꼬린쏘스 등등) 아씨나의 아끄로뽈리는 리까비또스와 함께 아씨나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지역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56m이며 시내의 일반적인 지면보다 91m 가 더 높다.

현재의 건축물들은 아씨나가 페르시아와의 두 번에 걸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서, 그리스도 이전 476년에 결성된 딜로스(델로스) 동맹을 근거로 뻬리끌리스의 지도아래 아씨나 제국이 성가를 구가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서 440-430년 어간에 건축된 것이다.

필립 2세의 그리스 정복 후,  로마제국이 세력을 동쪽으로 확장 그리스도 이전 146년에 완전히 그리스 및 아시아 각 지역이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아씨나의 철학학교가 폐쇄된 이후에는 완전히 지방의 시골 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1834년에 아씨나가 다시 그리스의 수도가 되면서 발전해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뻴로뽄니소스 전쟁 이후 더욱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철학학교가 폐쇄되기까지 비록 아씨나가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 인류역사에 끼친 공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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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뮬레의 문

현재에 사용되고 있는 두 개의 입구 중 하나로 로마시대( 약 280년경)에 건축된 구조물로서 기원전에는 없었으며 특히 야만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용 성벽으로 축성한 것이다.

뷸레 게이트 라고 명명하게 된 것은 이 지역을 발굴 복원한 프랑스인 고고학자 에르네스토 뷸레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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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신전

전면과 후면(동, 서 방향)에 각 네 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세워져 있는 아주 우아한 건축물로서 승리의 여신 니끼(나이키)를 섬기던 신전으로 깔리끄라띠스에 의해서 기원전 427-424년에 건축되었다.

뻰델리 산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신전의 크기는 길이 8.27미터 폭 5.44미터 기둥의 높이는 4.66미터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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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립바 기념좌대

사 두 마차 청동상은 아마도 그리스도 이전 178년의 빤아씨나익 경기에서 뻬르가모스(버가모)의 마차가 우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후대에 쁠루따르호스와 로마의 디오 카시우스에 의하면 이 위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조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기원전 31년에 내려지고, 기원전 27년에 마르쿠스 아그리파에 의하여 다시 사 두 마차의 기념물이 세워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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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들

‘쁘로삘래아’라는 말은 ‘대문들’ ‘전문들’이라는 뜻으로 전주문을 의미하며 그리스도 이전 437-432년에 건축 되었으며 므니시끌리스(MNESICLES)에 의해 설계되었다. 뻴로뽄니소스 전쟁에 의해 공사가 중단(그리스도 이전 432년)되었으며 이후에 결국 완공되지 못했다. 이오니안 양식과 도리아 양식이 혼재하여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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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신전은 아끄로뽈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며 인류 건축 역사 중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위대한 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빠르쎄논’ 이란 의미는 아씨나 여신의 별명이 "빠르쎄노스"로서 여신 아씨나를 모시던 신전이기에 빠르쎄논(복수 소유격 형태) 이라고 불리고 있다. 즉 아씨나 여신이 여신들 가운데 처녀로서 살았기에 그에게 별명, 별호, 별칭을 붙여 "빠르쎄노스 이 아씨나"라고 불렀는데 빠르쎄노스란 처녀, 정확하게는 동정녀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이전 447-438년에 건축되었으며 조각가인 피디아스의 총감독에 깔리끄라띠스와 잌띠노스가 설계했고, 뻰델리 산의 대리석을 이용하여 도리아식 기둥양식으로 건축한 대표적인 건물이다.  외곽으로 전체 46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으며 기초부분의 크기는 길이가 72.4M 폭이 33.7M 이다. 신전 기둥부터의 크기는 길이가 69.51미터이고, 폭은 30.86미터, 기둥의 높이는 10.45미터이며 20개의 홈이 파여 있다. 

신전 내부에 있었던 상아와 금으로 만들어 졌던 피디아스가 조각한 아씨나 여신상의 입상은 좌 대가 2미터, 입상의 크기는 10미터로 여기에 들어간 황금은 자그마치 1.150 킬로그램으로 동쪽을 향하여 서 있었다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은 엔타시스 양식으로 시야의 외곡을 보정하고,  건물의 거의 모든 부분이 곡선으로 이루어져있어 다름답고, 기둥이 기울어져 안정감을 주며, 완벽한 균형미를 갖춘 최고의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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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렉시온 신전

이오니아 양식으로 이루어진 이 신전은 기원전 421년에 건립이 시작되어 기원전406년에 완공된 건축물이다.

여섯 개의 이오니아 양식으로 건립된 동쪽 부분은 아씨나 여신의 성소로 기둥의 높이는 6.8미터이며 엘렙시나에서 가져온 어두운 색조의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신전의 남쪽 부분에 있는 소녀들의 현관은 아름답다 못해 경이로운 조각 물로 여섯 개의 ‘까리아띠데스’ 상이라고 불리우는 소녀상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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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망 대

파르테논 신전을 지나 직진하면 그리스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는 지점에 당도하게 되는데 이곳이 아끄로뽈리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며 아씨나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아끄로뽈리 바로 밑에는 쁠라까가 위치하고 있고 멀리 국회의사당과 올림삐오스 제프스 신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기념문, 자피온, 빤아씨나꼬 스따디오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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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 안티크스 음악당

160-161년에 이로아스 아띠꾸스가 자기의 부인 레길라를 기념해서 건축한 하나의 오디온(음악당) 으로서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후에 파괴된 것을 발굴 복원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건축물로서 무대와 후면의 막은 원래의 건축물이고 객석의 자리와 오케스트라의 바닥은 1960-61년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현재 여름에는 아씨나 축제가 여기서 열리고 세계각국의 예술가들이 매년 공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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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 극장

아끄로뽈리의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극장으로서 현재는 다 파괴되고 오케스트라와 관객석의 일부만 남아 있지만 과거의 화려했던 건물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원래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그리스도 이전342-326에 리꾸르로스에 의해 개축되었다.

극장의 넓이는 100 미터, 길이는 90 미터, 78열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수용인원은 18.000명 이었다

6.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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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신전

그리스 내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신전(110.35 X 43.68m)으로 완전히 완공되는데 약 700년이란 세월이 소요되었으며 제프스(제우스) 신을 모시던 신전이었다.  아씨나의 통치자였던 삐시스뜨라또스 때인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건립이 시작되어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그 후에 정권이 교체되어 중단되었다가, 175년 안띠오호스 에삐파니스(ANTIOCHUS EPIPHANES) 4세의 명으로 로마의 건축가 코수티오 데끼모(KOSSOUTIO DEKIMO)에 의해 뻰델리 산의 대리석으로 건립이 계속되었으나, 안띠오호스의 죽음으로 다시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에 재정난 등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방치되어 있다가 로마의 하드리아누스(HADRIANOUS) 황제 때인 그리스도 이후 130년에 완공되었으며, 원래 104개의 기둥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14개의 기둥만이 서있고 2개의 기둥은 쓰러져 있는 상태로 있으며 나머지는 일부만 남아 16개만 남아있는 상태다.  아칸서스 문양이 아름다운 꼬린쏘스 양식으로 건립된 이 제프스 신전은 외곽의 긴 쪽(동서 방향)으로는 20개의 기둥과, 짧은 쪽(남북 방향)에 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고, 신전에 들어간 기둥은 전체가 104개였으며 높이는 17.25m 이었으며, 신전 안에는 황금과 상아로 이루어진 제프스의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신들의 제왕인 제프스의 위상에 걸맞게 건립된 이 신전은 후에 지진에 의해 흔들렸고, 대부분의 많은 기둥들이 터키인들에 의해 다른 건축 자재로 사용되어(예를 들면 현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교회 옆에 있는 지하 저수조의 기둥 등) 아쉬움을 더해 준다.

올림픽 경기장

1896년 제 1회 근대 올림픽이 열렸던 장소로 경기장은 204m X 33m 이며 1896-1906년에 아나스따시오스 메탁사에 의해 복원되었다. 광장 정문 우측에는 복원비용을 부담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부자인 게오르기오스 아베르프의 동상이 있으며, 경기장 안의 오른쪽 다섯 개의 비석에는 역대 올림픽이 열렸던 도시의 이름이 적힌 비석과 역대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의 이름이 적힌 비석 그리고 경기장 복원경위가 적힌 비석이 있다. 왼쪽 6개의 비에는 그리스가 그 동안 역대 올림픽에서 획득한 금, 은, 동메달 수상자의 명단이 연대 및 장소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 경기장의 사용 용도는 마라톤 경기의 결승점과, 가끔씩 시민의 집회장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이곳에서 음악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전체 수용 능력은 6만9천명으로 고대 경기장의 형태인 말발굽 모양으로 되어 있고, 경기장의 객석 전체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경기장 중간 부근에는 등받이가 있는 귀빈석이 있으며, 그곳을 지나 맨 안쪽 양편에 그리스인들의 해학이 농축되어 있는 두 개의 대리석 동상을 볼 수 있다. 

고대 올림픽 경기는 전부 알몸으로 시합에 임하였으며, 선수의 자격 요건으로는 1)순수한 그리스인 일 것과(135회부터는 외국인도 참가함으로 이 요건은 폐지됨) 2)신을 말이나 행동으로 모독한 사실이 없을 것 3)범법한 사실이 없는 준법 자 일 것 4)9개월간이나 10개월간의 개인 훈련을 필 한 사람일 것 5)1개월간의 합숙 훈련을 마친 사람일 것 6)상기 조항에 대해서 전혀 하자가 없다고 신전에서 신에게 굳게 맹세를 필 한 사람일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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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누스 개선문

그리스도 이후 132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당시에 구도시와 신도시의 경계 역할을 했다. 높이 18m, 폭 12.5m, 두께가 2.3m이며 제프스 신전을 향해서는 "이것은(도시) 씨세아(테세우스)의 도시가 아니고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다"라는 비문과 아끄로뽈리를 향한 면에는 "이것은 씨세아의 옛날 도시 아씨나이다" 란 비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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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누스 도서관

모나스띠라끼 광장에 위치한 아레오스 길과 애올루 길 사이에 있는 이 도서관은 제프스 신전에 이은 아드리아노스 황제의 희사에 의해 그리스도 이후 2세기에 건립된 커다란 건축물이다. 이 도서관은 길이 58m, 넓이 13m에 이르는 정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쪽으로 향한 5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건물 벽에 구멍을 만들어 두어 책을 보존하였다고 한다.

이 도서관 옆에는 1759년에 건립된 스따로빠자로스의 모스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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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메네스 가게

헤로데 안티쿠스 음악당에서 디오니소스 극장까지 연결된 스토아로 길이는 163 미터 였으나 현재는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있다.  본래는 64개의 도리아 식 기둥으로 이루어진 이중 회랑의 큰 건물이었으며 뻬르가모스의 왕 에브메니스 2세(197-159 기원전)에 의해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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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클레피우스 성소

아까르네의 뗄레마꼬스에 의해 그리스도 이전 4세기에 봉헌되었으며 의술(치료)의 신인 아스끌리삐오스를 모시던 신전의 역할을 했다.

이곳에 두 개의 전이 있어서 환자들은 한곳에서 쉬며 한 밤중에 나타나서 치료한다는 신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었고 근처에 있는 성 우물에서 몸을 정결케 하였다. 이 신전은 베네치아인들과 터키인들의 교전으로 파괴되었다.

프닉스 언덕

고대 아씨나 인들의 사회적 정치적인 민회의 집회 장소였던 이 쁘니까 언덕은 아리오스 빠고스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이전 5세기의 위대한 인물들인 아리스띠디스, 뻬리끌리스, 쎄미스또끌리스, 디모스쎄니스 등이 열변을 토하기도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민주주의가 꽃피우고 공화정 제도가 성장하였기에 민주주의의 요람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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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빠뽀스 언덕

필로빠뽀스는 아씨나의 빼어난 시민이면서 총독으로 봉직하다가 그리스도 이전 114년에 죽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그를 기리는 송덕비를 114년에서 시작하여 116년에 건립한 것이다.  본래에 그는 시리아 북부 지방의 코마게네의 왕으로 그의 이름은 가이오스 율리오스 안띠오호스로 필로빠뽀스라는 이름이 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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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스의 언덕

‘아리오스’(전쟁의 신, 로마의 마스)와 ‘빠고스’(바위, 언덕)란 말로 신화에 의하면 군신 아리오스가 자신의 딸을 강간한 청년을 살해하자 이에 대해 신들이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50-52년 경에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시 아고라에서 스또아 학파와 에삐꾸리오스 학파와 논쟁을 벌이다가 그들에게 붙들려 이곳에 세워져 말씀하셨던 곳이다.

​아고라

옛 아씨나 인들의 삶에 있어서 심장 역할을 했던 곳이다. 아고라는 고대에 있어서 단순한 상업적 중심지가 아니라 여기에 모든 공공 건물들과 시설물들, 신전들과 가계들, 사무의 중심지로 시민들이 운집했던 곳이며, 여기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정보를 수집 교환하고 새로운 것들을 전파하던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장소였다.

헤파이스토스 신전

 헤파이토스 신전은 예능의 수호신들인 아씨나(주로 도기 계통) 여신과 이패스또스(주로 금속 계통) 신을 섬기기 위해 아고래오스 꼴로노스 언덕에 기원전 449년에서 444년 어간에 건축된 것이다. 그리스 내에 남아 있는 신전 가운데 가장 완전하게 남아있는 신전이다. 

건축 양식은 도리아 식이며 가로 13개, 세로 6개의 기둥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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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카

아씨나의 구 도시 지역인 이곳에 이르러서야 옛 정취를 비로소 느낄 수 있으며 좁고 굽은 길과 신 고전 색상과 양식의 건물 그리고 작은 정원과 계단 등을 들여다 보며 걷노라면 옛 시대로의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곳이다. ‘쁠라까’라는 말은 한 커다란 ‘석판’이 아드리아누 길과 뜨리뽀돈 길의 바닥에 굳게 박혀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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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용사의 기념물

국회의사당의 정면에 있는 이 기념물은 1929-1930년도에 조국을 위해 산화한 알지 못하는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것이다.

해마다 6월25일을 기하여 한국 대사관의 대사와 무관 주최로 그리스 한국전 참전 용사들과 한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6, 25 참전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에 있는 교대 식은 군악대를 동원하여 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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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아

그리스 건축의 재현이라고 불린다.

오렌지 나무 뒤 편에 있는 좌상 가운데 좌측은 쁠라또나스이고 우측에는 그의 스승 소끄라띠스상 이며, 건물의 왼쪽 편에 청동 방패와 창을 들고 있는 입상은 아씨나이고 우측에 하프를 들고 있는 상은 아폴론 상이다. 현재의 이 건물은 학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리까비또스 언덕

“이리들의 언덕”으로 불리는 곳으로 해발 277 미터이며 아씨나의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지진대에 포함되어 있는 아씨나는 고도를 제한하였기에 높은 건물이 별로 없으며 건물을 연이어 지었기에 답답함을 주지만 건물 위에 설치되어 햇빛을 반사하는 태양 열 기구 등은 새로운 정취를 자아낸다. 정상에 있는 희다 못해 눈부신 백조의 건물은 성 요르고 그리스 정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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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

신따그마’(‘헌법’이라는 뜻으로 1843년도에 현 국회의사당의 발코니에서 새로운 헌법이 공표된 것에서 유래) 광장에 있는 이 국회 의사당은 본래에 그리스의 초대 왕이었던 오또(OTTO)와 왕비 아말리아(AMALIA)를 위한 왕궁으로 건축가 칼 토너의 설계로 1836-1842년에 지어 졌으며, 이곳에서 두 번째 왕인 요르기오스(GEORGIOS)가 기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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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아끄로뽈리 박물관에는 아테네 아끄로 뽈리의 신성한 바위와 직접 연결되는 고대 및 고전 그리스 예술의 독창적 인 작품을 중심으로 독특한 걸작이 있습니다.  이들은 무료 봉헌 조각품과 아끄로뽈리의 다양한 역사적시기에 세워진 건물을 장식 한 건축 조각 세트입니다.

박물관의 전시 섹션에는 봉헌 및 해결 부조, 꽃병, 인형 및 부조와 같은 도자기뿐만 아니라 청동 봉헌 인형 및 도구와 같은 기타 작은 품목도 포함됩니다.  청동 물체와 도자기 조각 중 일부는 보관 된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옮겨졌습니다.

8. 국립 고고학 박물관

빠띠시온 거리에 있는 뽈리떼흐니오 건물 곁에 신고전 양식으로 건립되었다. 서양 문명의 발상지라고 불리는 그리스에서 이 국립 고고학 박물관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영국에 관광차 간 사람이 대영 박물관을 보지 않고 오는 것 보다 더한 것이다.

이 박물관은 엘레니 또시차의 대지 헌납과 디미띠리오스 베르나다끼의 재정적 희사로 1866-89년에 건축가 랑게와 질러에 의해 완공되었다.

1881년도에 이런 저런 명칭으로 불리던 것을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라고 통합하여 명칭 하였다. 그 후 1925-1939년에 대대적인 개축 및 확장공사를 통하여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리스 전역에서 출토된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근래에 발굴된 유물은 발굴 지에 박물관이 있는 경우 현지에 보존한다는 원칙에 따라 소장되어있지 않은데 대표적인 유물들은 끄리띠와 벨기나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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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테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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