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때의 목사님에 대한 의식은 두꺼운 안경과 그 너머에 있는 날카로운 시선과 미소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목사님의 아들을 절친한 친구로 두었던 나는 사택에서 그들의 삶의 단면을 종종 보아왔다.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엄격함과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이 나에게 가끔은 커다란 모순으로 다가왔지만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사랑은 그 모순을 상쇄하고고 남아 지금껏 내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다.
‘목사란 반드시 눈이 네 개가 있어야 (눈目 넉四, 육적인 눈에 영적인 눈을 합하여) 하고, 목이 곧지 않고 죽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세월과 함께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생각하는 목사에 대한 부정적 의식구조는 대체로 아래와 같다.
«목사가 나이가 어리면 경험이 부족하다 하고, 나이가 많으면 시대에 뒤 떨어진 목사라 하고, 식구가 많으면 주책이라 하고, 적거나 없으면 그래서 가정을 이행하지 못한다 하고, 원고를 보고 설교를 하면 신령치 못하다 하고, 원고 없이 설교하면 도무지 준비성이 부족하다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쏟으면 인기작전이라 하고, 부유한 사람과 친하면 돈만 안다 하고, 예화를 많이 인용하면 성경 실력이 없다 하고, 예화를 인용하지 않으면 너무 딱딱하다 하고, 죄에 대해 설교를 하면 인신 공격한다 하고, 아니하면 정의감이 부족하다 하고,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면 줏대가 없다 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사랑이 없다 하고, 옷을 잘 입으면 사치한다 하고 꾀죄죄하면 교회 망신만 시킨다 하고, 밖에 나가 설교를 하면 본 교회를 등한히 한다 하고, 나가지 아니하면 실력이 없다 하고, 사례를 많이 받으면 돈만 안다 하고, 적게 받으면 교인들의 체면이 무엇이냐 하고, 몸이 아프면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 하고, 건강하면 금식도 할 줄 모르고 몸만 위한다 하고, 찬송가만 부르면 벽창호라 하고, 유행가라도 부르면 너무 세상적이라고 하고...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누군가 부른 유행가 가산디...)
목사에 대한 긍정적 의식구조 속에서 관계를 갖고 대한다면 그들의 사역과 삶의 자리와 고통을 한결 이해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신 것 가운데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전4:1)라는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시 들려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목사의 주식은 아멘, 부식은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후식은 감사합니다’’라는 스승의 가르침은 상당히 해학적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요소와 동시에 내 삶에 일관적인 부담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주식, 부식, 후식은 없고 그저 ‘수고 하셨습니다’ 라는 말과 말없음 표의 행진에 더욱 무표정인 마른 손만 대한다면 목사는 가슴 메어져 오는 아픔을 부여 안게 된다.
따라서 교회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많이 되뇌어지는 것이 좋은 일이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목사와 성도가 서로서로 감사의 언어로 교제 하여야 한다.
목사란 어느 특정인의 목사일 수는 없다.
영국의 마이어(MEYER, F.B) 목사는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알려진 신앙인 워너메이커(WANAMAKER)의 전보로 미국에 건너가 만나게 되었다. 워너메이커의 말은 ‘‘큰 강당과 성경학교도 지어 목사님께 드릴 터이니, 필라델피아로 오십시오’’ 라는 것이었다. 그 때 마이어 목사는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못되고 워너메이커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그는 크게 감복하여 마이어 목사를 더욱 존경하고 축복했다는 일화가 전해 지고 있다.
목사로 하여금 개인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격려하고 고무해야 할 책임은 바로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요구하지 말라. 그는 결코 슈퍼맨이 아니다. 그는 이래저래 가슴 아파하는 연약한 그릇인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 그는 당신의 기대를 또한 모두의 기대를 다 채울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다.